'마이 페이보릿/두개의 달'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0.03.24 K-PAX
  2. 2010.03.24 에바 캐시디
  3. 2010.03.15 정인 1st . 미워요
  4. 2010.03.13 SALYU
  5. 2010.03.10 체 게 바 라
  6. 2010.03.10 빌 리 홀 리 데 이
  7. 2010.03.10 위대한 항해
  8. 2010.03.09 뒤샹
  9. 2010.03.09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0. 2010.03.08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K-PAX

2010. 3. 24. 03:36 from 마이 페이보릿/두개의 달



가끔 , 역 시  행 복해 .. 라는 생각이 들때
몇 해 전 여행 중에 먹었 던 닭꼬치를  다 시 만났 을 때
우연히 다운 받은 영화가 내 마음의 기록을 닮았을 때 ,  











내가 정신과 의사가 되어 처음 맞았던 환자는 P라는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화가였는데, 우주로부터 빛의 형태로 된 기운이 내려와 영감을 전해 줌으로써 자신이 이 세상을 바꿀 위대한 작품을 만들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녀는 영감을 좀 더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라며 옷을 다 벗어 던진 채 수백 개의 촛불을 켜고 여의도 공원에 서 있다가 강제로 병원에 끌려 들어왔다. 명백한 과대망상 증세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현실감이 조금씩 회복되어 가면서 시작되었다. ‘완전 초보’ 정신과 의사였던 나는, 도무지 어디까지가 과대망상이고 어디서부터가 예술적 창조성인지, 입원 전에 행했다던 파격적인 퍼포먼스들은 과연 정신병 증상이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예술적 주관이었는지 심히 헷갈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가 아침에 병동에 나와 앉아 병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대해 묘사해 줄 때면, 나도 모르게 그녀의 감성 넘치는 표현에 빨려 들어가며 함께 실눈을 뜨고 햇빛을 감상하곤 했다. 심지어 어떨 때는 그녀가 회복되면서 자유로운 감수성이 조금씩 억제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까지 들었다.

●나도 스톡홀름 증후군?

지난달 국내에 개봉되고 이달 초 비디오로 나온 ‘케이-펙스(K-Pax)’는 자신이 머나먼 라이라 성좌의 ‘케이-펙스’라는 별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남자 프롯(케빈 스페이시)을 그린 영화다. 그는 지구의 햇빛이 ‘케이-펙스’의 광량보다 너무 높다며 늘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고, 사과며 바나나 같은 ‘지구 과일’들을 예찬하며, 외계어를 들려주기도 한다.

프롯이 병실에 입원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변화를 가져오자 주변 환자들은 그가 진짜 외계에서 온 사람이라 믿기 시작하고, ‘케이-펙스’로 돌아갈 때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그가 자신의 별로 돌아가겠다고 예고한 날 일어난 사건들을 보며, 나는 오래전의 P를 떠올렸다.

이 영화는 정신과 환자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갖는 몇 가지 상투적 오해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마음을 끌었던 점이 있다면, 프롯을 치료하던 정신과 의사 마크의 심정이 P를 만났던 당시의 내 이야기와 닮았기 때문이다. 일상의 관계들이 피곤하고 버거웠던 그는 프롯의 진실을 밝혀낸 후에도 그가 진짜 외계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정신의학에서는 현실과 다른 생각을 확고히 믿는 증상을 망상이라 한다. 지금은 뇌신경체계의 이상이 망상의 가장 큰 원인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를 일으키는 심리적인 동인은 괴로운 현실을 부정해 버리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바람이나 두려움을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로 투사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결과 환자들은 실제 현실이 아닌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나오길 한사코 거부하게 된다.

주인공 프롯은 가족의 죽음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현실로 받아들여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의 슬픔과 두려움과 분노, 심지어 자신의 존재와 이름도 부정해 버리고, ‘케이-펙스’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케이-펙스’에서 아무도 가족을 이루지 않음을 강조하는 것도 “나는 가족을 잃어 슬프고 고통스럽다”는 마음을 부정하고 “거기서는 아무도 가족을 이루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바꾸어 믿음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절박한 시도인 것이다.

P의 경우 역시 그녀의 마음속에는 자기 재능에 대한 열등감과 좌절감이 뿌리 깊게 자리해 있었고, 우주의 영감을 받는다는 과대망상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런데 가끔, 우리가 망상이라 믿는 환자의 생각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하는 상상을 해 볼 때가 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현실이란 얼마나 좁디좁은 것일까. 또 인식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며, 심지어 사소한 일상에서조차 현실적인 입장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말이다.

더구나 마음이 복잡할 때는, ‘케이-펙스’ 같은 나만의 세계를 하나 마련해서 거기로 떠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으니, 차라리 지구별에 놀러 온 외계인의 눈으로 조금 낯설고 신기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워 보면 어떨까 한다. 그건 일상이 무료하고 지겨울 때, 특히 거리마다 버글거리는 인파에 염증이 날 때, 아무 데서나 소리 높여 떠드는 사람들 때문에 심란할 때, 그리고 맛없는 음식을 먹어야 할 때 매우 유용할 것 같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 경상대병원 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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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이슬이 내리는 아직은 어두운 한강변  .
귓속에 가득 차있는 엔진소리를 끽끽대는 와이퍼와 함께 잠시 멈추고
마치 끝이 없는 듯 쏟아지는 빗 속에 최대한 움크려 숨어 있었어  . 

너무나 기다렸 던 순간이야 ...  

그 순 간  . 나의 호흡과 함께 숨을 죽인  CD플레이어의 버튼 을 누르면    
이내   차가운 공기에 갇힌 시야가    울 렁 .울 렁 대다 가 ...  
벌 컥 ,    쏟아져 나오는 ' 거짓말로 감싸놓은 사실은 속상했던 마음 들 ' 
나는 가끔 나 자신도 감쪽같이 속이는 사기꾼 . 
오로지 그 녀 만이 위로 할 수 있었 던  .. 
스 물네살  꿈 많은  계집아이의  그 ,  ㅁㅁㅁ  .   


 


















































1963년 2월 2일, 미국 워싱톤(Washington, DC)근교에서 태어난 에바 캐시디(Eva Cassidy)는 재즈, 블루스, 펑크(Funk), 가스펠, 컨츄리 그리고 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내는 미국의 보컬리스트로
음악을 좋아하는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2살때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

닐 영(Neil Young), 조안 배즈(Joan Baez), 버피 세인트 마리(Buffy Saint Marie) 등의 포크(Folk)뮤지션의

 노래를 즐겨 들었고 민속 음악과 재즈를 좋아했던 그녀는 9살이 되어 아버지로부터 기타를 배운다.
 

11세때부터 워싱턴 근교의 "Easy Street"라는 밴드에서 기타 연주에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1980년대 테크노 팝 밴드를 비롯, 여러 밴드에서 활동하였을 뿐만아니라,

보육원 정원사, 가구 페인팅, 조각, 쥬얼리 디자이너로도 일을 한다.
 

1986년, 그녀의 하이스쿨  밴드, 스톤 행지(Stonehenge)의 기타리스트였던 데이빗 루림(David Lourim)의

프로젝트 앨범, "Method Actor"에서 첫 레코딩을 계기로 많은 뮤지션을 소개받으며
훗날 그녀의 매니저가 될 프로듀서 크리스 비욘도(Chris Biondo)를 만나

고고(go-go) R&B 스타일의 익스피어리언스 언리미티드(Experience Unlimited)밴드에서부터

랩퍼, E-40 밴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셰션 싱어로 앨범에 참여한다.
1996년, 그녀의 첫 앨범인 "The Other Side"는

고고(go-go)뮤지션, 척 브라운(Chuck Brown)과 함께한 듀엣 앨범으로

"Over the Rainbow"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 앨범 후, 많은 레코딩 제안이 들어오긴하지만 그녀의 음악이 재즈, 블루스, 가스펠, 팝등 다양한 장르를 망라하다는 점이

오히려 음반 기획자로하여금 정확한 고객층을 확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한다.
하지만,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내는 그녀의 천재성은

1993년 워싱톤 뮤직 어워드(Wammie award)에서

"Vocalist Jazz/Traditional "와 "Roots Rock/Traditional R&B"의 두장르를 동시 석권하며 드러나게 된다.
그해 건강검진 중 발견된 등에 생긴 종양을 제거하고

1994년, 블루 노트 레코드사(Blue Note Records)와 계약을 맺어 팝-재즈 밴드, " Pieces of a Dream"와 함께 투어를 시작하지만 에바는 크게 만족하지 못하고

 1996년 1월, 블루스 앨리(Blues Alley) 클럽에서 공연한 곡들로 녹음 된 "Live at Blues Alley"를 발매,

워싱톤에서 한정 판매를  하며 대중에게 좋은 반응을 얻는다.
하지만 프로모션 이벤트를 진행하는 중 엉덩이 쪽에 통증을 느끼게 되어 X-Ray를 찍어본 결과

흑색종(melanoma)의 발견, 이미 폐와 뼈에 퍼져있어 치료는 시기적으로 늦어버린 상태였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두번째 앨범인 "Live at Blues Alley"는 그녀의 유일한 솔로 앨범이 되어버렸고

그녀는 생전의 마지막 공연에서 "What a Wonderful World"를 부르며

1996년 11월 2일, 그녀의 나이 33세 짧은 생애를 마친다.
 

세상 사람들은 그녀가 죽은 뒤에야 비로서 그녀의 음악적 재능을 알게 되었고

사후에 어렵게 찾은 스튜디오 녹음본으로 "Eva by Heart"를 비롯 5장의 앨범이 더 출시,
2000년에 미발표곡 10곡이 수록 된 "Songbird"가 영국에서 발매되어 100만장 이상 판매고를 올리며

BBC에서 그녀에 관한 다큐멘타리가 만들어지면서 그녀의 노래는 세상에 알려지기 사작한다.
가장 위대한 목소리를 가진 싱어중 하나로 선정되었던 그녀는

결코 화려하거나 두드러져 보이진 않지만

놀라운 곡 해석력, 다양한 장르를 무리없이 소화해내는 뛰어난 실력으로
아쉽게도 생전에는 고단한 클럽의 무명 가수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난 후

오늘날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는 최고의 여가수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출처] 전기영의 뮤직 테마 그 일흔번째 - 에바 캐시디 (Eva Cassi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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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쌍의 객원보컬로 시작 된 정인의 1st 앨범이 나왔다 . 10년만에 ..
그사이 '역시 , 밴드 음악은 죽었어' 를 여지없이 각인 시키고 증발했던
'지 플라' 라는 성과없는 앨범이 한장 나오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녀의 음악성을 나름들 높게 평가 하면서도  
그녀가 '음악'을 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것 같다.
'사랑은' 이 지금의 정인을 만들어 주었지만
죽을때까지 '사랑은'의 시리즈를 불러야만 하는 정인
그녀는 지금 , 안녕할까 .










정인 1st  ' 미워요'

감성천재 '이적'이 지휘봉을 잡은  자칭  화장을고치고 와 애인있어요의 계보를 잇는 한국형서정적발라드 '미워요'  
    












지플라 1st '우리'

지플라 1st 콘써트 중 한번 듣고 반해버렸던 '우리'






'사랑은'  원곡










사랑은 -리쌍  Feat 정인 

대부분 정인의 곡으로 알고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인 혼자 다부른 , 정인의 정인만을 위한 곡 '사랑은'





차갑게 돌 아 섰지 .
내 떨린 손을 니 가 보지 못하게
내 아픈 마음도 내 슬픈 눈빛도
생각 나면 못견디게 될까봐
니가 보란듯 누군 갈 만나 애써 바쁘게 보내고
사랑했던 널 기억 속 에 가둔 채
잊혀지 길 기다린 거야
꿈이라면 좋겠어 다시 눈을 뜨면 니가 곁에 있겠지
사랑했었 던 만큼 시간이 지나면 정말 잊혀질 까봐
아 파 와 ..



-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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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YU

2010. 3. 13. 18:11 from 마이 페이보릿/두개의 달

한 살 , 두 살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만날 수 있겠지 '살 유'
하면서 몇 년이 훌 쩍 가버렸어 . 
하얀 도트의 원피스 , 피치의블러셔  , 반듯한 레고어깨 그녀를 대변하는 형용사는 무궁무진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부르는 부드러운 밀크톤의 보이스 는 한없이 따뜻한 ' 허 그 ' 이니까 .

http://www.salyu.jp/ 
#  살 유 네 집









# Platform






# Dialogue







# Half Way (영화 'Half Way'OST)







# Valon 








# Glide [릴리 슈슈의 모든것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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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는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노(Rosarino)의 중류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2살 때 발병한 천식은 그를 평생 괴롭혀 왔는데, 공기 좋은 곳에 이사를 다녀봐도 증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초등학교 과정은 결국 어머니 곁에서 자택학습(Home Schooling)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프로이드의 저서에 심취했으며 1941년 그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문학과 체육과목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스페인 내전에 휘말린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인 게바라는 좌익 파시스트가 득세한 독재국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에 환멸을 느껴 한때 '反 페론'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군사정권에 강하게 반발했으며 자본가들의 '富의 독점' 특히 미국식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그들을 풍자하는 무언극을 쓰기도 했다. 기록에는 그의 어머니 역시 '反 페론'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나와있다. 194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 진학한 게바라는 의학을 전공했으며 급진적 학생운동에는 가입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만 보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학을 공부하면서 우선 자신을 괴롭혀온 천식에 관해 관심을 보였으나 차츰 나병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가 난생 처음 긴 여행길에 오른 것은 1951년 북 아르헨티나를 자전거로 일주한 것. 그때 그는 병들고 가난에 찌든 인디오 원주민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들과 교분을 나누기도 했다. 1951년 의사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더 길고 긴 여행을 떠났는데, 칠레에서는 한때 좌파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올랐다가 반혁명 혐의로 사형 당한 아옌데(Salvador Allende)를 만나기도 했다. 페루의 나환자촌에서 한동안 봉사활동을 했고 콜롬비아를 여행할 때에는 폭동이 일어났는데 시위대로 몰려 잠시 구금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베네주엘라, 마이에미 까지의 긴 여행을 마친 후 잠시 집에 돌아와 평소에 관심을 보였던 나병과의 인연으로 피부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지만 중류계급을 보장받는 개업의가 되길 원하진 않았다. 다시 여행길에 오른 그는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만났으며 이를 지켜보기만 하는 자신을 기회주의자로 자책하며 고민하다가 마야와 잉카문명에 관한 고고학 쪽에 눈을 돌려 과테말라에 오래 머물렀다. 과테말라는 당시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있었는데, 게바라는 일찍이 마르크스와 레닌에 심취한 적이 있었지만 공산당 가입은 거부했고 따라서 정부가 제의해온 의료담당관 자리고 뿌리치고 말았다. 그는 그곳에서 인디오 혈통의 마르크스주의 가디아(Hilda Gadea)와 함께 지내며 정치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그때 카스트로의 조직원인 로페즈(Nico Lopez)를 소개받았다. 과테말라에서 그는 미국 CIA의 반혁명 대리공작을 낱낱이 목격할 수가 있었는데 그는 그때 "혁명은 오직 무장봉기로만 가능하다"는 신념을 얻게 되었다. 게바라는 이곳에서 운명적인 혁명가의 길을 택한 셈이다.
과테말라의 사회주의 정권은 망하고 1954년 그는 멕시코로 옮겨가 그곳에서 본업인 병원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거기서 또다시 가디아와 로페즈를 만났고 마침 그곳에 망명해온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결국 카스트로 조직에 가담했고 스페인 공화군 장교 출신인 바요(Alberto Bayo)로부터 전문적인 게릴라전 교육을 받아 훌륭한 비정규전투요원이 되었다. 바요는 자신의 전투경험 뿐만 아니라 모택동의 게릴라전술도 가르쳤다. 그의 유망한 제자이자 그룹의 리더가 된 게바라는 이탈리아어로 '단짝'이라는 의미의 '체'(Che)라는 애칭이 따로 붙었다. 그 무렵 강도 높은 실전 훈련이 비밀리에 계속 되었고 그 현장이 경찰에 발각되어 많은 쿠바인 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한달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1956년 드디어 쿠바에 상륙, 의사이자 혁명군의 지휘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는 매우 공격적이고 탁월한 지휘자였으며 철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신봉자였다. 그는 변절자들을 가혹하게 다뤘으며 특히 부정축재로 실각된 전직 대통령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y Zald ivar)의 추종자들을 다수 처형함으로서 조직을 강화했다.
마침내 혁명은 성공했고 1959년 설날 아침에 아바나에 입성함으로서 카스트로에 이어 쿠바의 제2인자가 되었다. 그의 동료 중에 소비에트 공산주의자가 몇 있기는 했지만 정식 공산당원은 없었으므로 쿠바 공산당은 그들에게 비우호적이었다. 카스트로가 사회주의로 완전히 돌아선 것은 미국의 지원아래 이뤄진 피그만 침공의 직후 였다. 1965년 카스트로는 쿠바공산당을 접수했으며 동시에 게바라는 국영농장의 감독이 되어 새로운 토지법에 의거 대부분의 토지를 압수했다. 국립은행의 총재도 맡아 전체 산업을 관리하게 되었으나 워낙에 황폐한 쿠바경제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959년 게바라는 마르치(Aledia March)와 결혼했고 함께 이집트, 인도, 일본,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유고를 방문했으며 공업장관도 겸한 그는 소련과 무역협정을 맺기도 했다. 따라서 미국시장에 종속되어 있던 쿠바의 설탕산업은 시장의 다변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 논리는 모택동의 전술에 매료되어 있었다. "혁명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 고 수정주의라고도 비난했다.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게릴라 원조 및 반란혁명의 완수를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그가 어딘가 에서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으나 그때 그는 아프리카에 있었다. 콩고에서 쿠바식 게릴라전에 의한 혁명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원조병력을 보내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볼리비아에서 게바라는 마지막 혁명의 모험을 시도했다. 게릴라의 구성원은 쿠바,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페루 출신들이었는데 볼리비아는 사실상 남미 5개국과 맞닿는 곳이어서 혁명을 위한 최적지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는 볼리비아 공산당은 소련의 영향력아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들은 당연히 게바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자 조직이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투 때마다 이탈자가 속출하고 기밀이 새나가 많은 조직원들이 체포되거나 피살되었다. 反게릴라전에 고도의 전략을 갖춘 미국CIA의 비밀첩보원들의 지원으로 게바라 부대는 숱한 기습을 받아 지리멸렬했고 그 역시 부상당한 채 포로가 되었다.
1967년10월9일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꿈꾸던 한 젊은이의 파란 많은 일생은 볼리비아의 이름 없는 작은 촌락 라이게라(La Higuera)에서 수발의 총성으로 막을 내렸다. (비밀리에 매장된 체 게바라의 시신은 1997년에야 발견되었다)










<쿠바혁명 이후 체게바라를 담은 영상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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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llie Holiday - Strange Fruit >





Billie Holiday Billie Holiday (1915~1959) 사람들은 흔히 좋지 못한 운세를 두고 핑계 섞인 체념으로 '숙명' 이라는 이름을 붙이곤 한다. 그러나 박복한 재즈 뮤지션들에서도 굴곡이 유난히 심한 인물이 있다.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한 흑인 여성의 삶을 놓고 본다면 '숙명'이란 단어만으로도 그 불우한 인생을 표현할 길이 없을 듯하다. 자기 뜻과 상관없이 떠맡겨진 것이 아닌 다음에야 그녀처럼 슬픈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 또 있을지 의문이다.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가수 라 일컬어지는 빌리 홀리데이... 그녀의 목소리에는 영감이 넘쳤으며 성량의 풍부함에서 아무도 넘볼 수 없었다. 그녀의 노래를 듣거나 함께 공연했던 사람 같은 시대의 위대한 라이벌이었던 엘라 피츠제럴드 매리언 앤더슨 마할리아 잭슨, 사라 본 조차도 기억한다. 빌리가 얼마나 천부 적인 감각으로 곡을 해석하여 멜로디와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지를...
 

사람들은 그 같은 창의력에 곧잘 도취되었으며 음역의 한계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유연한 발성과 필링 저음에서의 허스키한 잿빛 색조, 고음에서의 매끄러운 양감 마지막 부분을 부드럽게 떠는 서정적 비브라토 그리고 짙은 호소력에 홀린 듯이 사로잡혔다. 이 모든것들의 밑바탕에 깔린 저 어둡고 눅눅한 흑인의 설움 순간순간 타오르던 불꽃 은 정열...

 
그러나 이 대스타의 44년 밖에 안 되는 짧은 인생에서 젖먹이 시절을 뺀 41년은 굶주림,노동, 성폭행, 매춘 인종 차별, 마약중독, 감옥생활, 실연, 이혼 등 끝없는 멸시와 수치와 자포자기로 얼룩진 세월이었다. 평화와 안식은 어느날 아무도 모르게 병든 들개처럼 죽어간 뒤에야 찾아왔다. 빌리 홀리데이... 슬픈 목소리를 지니고 태어나 숙명인 양 슬픈 노래를 부른 여자... 진흑탕에 피어났다 스러진 한송이 치자꽃... 빌리 홀리데이는 1915년 4월 7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열여섯살 밖에 안 먹은 클래런스 홀리데이 어머니는 열 세살 소녀 새디 페이건 아기는 태어나서 어머니의 성을 따 엘리노라 페이건이라 불렸으나 3년이 지나 부모가 결혼하자 홀리데이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빌리라는 이름은 훗날 밤무대 시절에 만들어진 예명이다.
 
 
 
빌리의 어머니(13살)는 만삭이 되자 하녀로 일하던 집에서 쫒겨났다. 어쩌어찌 아이를 낳아 시댁으로 들어갔으나 비교적 잘사는 흑인 집안이었던 아버지(16살)의 부모로부터도 말 못할 홀대를 받았다. 그럭저럭 버티면서 3년뒤 결혼을 했으나 기타와 벤조 연주자였던 남편은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오자 유랑 악단을 따라 훌쩍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이혼했고, 또 각각 재혼했다. 불운하게도 두번째 남편마저 잃고 과부가 되자 빌리의 어머니는 식모살이를 하러 뉴욕으로 떠났다. 철부지 불장난의 업보를 가난한 친정에 떠맡기고 어린 엘리노라는 이렇게 하여 거부하는 몸짓조차 해보지 못한 채 어머니로부터 "불행"의 배턴을 이어받게 되었다.
 
 
 
홀로 남겨진 엘리노라는 1백살이 가까워 약간 노망기가 있는 증조외할머니와 따뜻한 정을 주고 받았으나 이것도 잠깐 할머니는 어느날 잠든 엘리노라의 목을 감싸안은 채 숨을 거두었다. 잠에서 깬 아이는 딱딱하게 굳은 할머니의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울어대다 이웃 사람들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이 충격으로 아이는 한 달간 입원했다. 열살도 되기 전부터 엘리노라는 학교에 다니면 서 오후에는 닥치는대로 허드렛일을 해 돈을 벌어야 했다. 몸집이 컸으므로 꽤 멀리까지 심부름을 가기도 했는데 이 때 우연히 사창가를 지나다가 축음기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루이 암스트롱이나 스미스가 부르는 재즈와 블루스였다. 첫 순간부터 그것들은 어린 소녀의 마음을 뭉클 사로잡았다.
 
 
 
아이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집으로 찾아 들어가 아무 일이고 할 테니 음악을 들려 달라고 사정했다. 그 뒤로는 앉으나 서나 어디에 있든지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랫말의 뜻이 뭔지는 잘 몰랐지만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후련해졌다. 아이는 어느덧 당시에 불리는 재즈들의 가사를 다 외우고 정확히 따라서 부르게끔 되었다.
 
 
 
 
1925년 열살 나던 해 엘리노라는 처음으로 끔직한 고통을 맛보았다. 일을 해주던 집에서 마흔살이 넘은 백인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것은, 경찰이 도리어 엘리노라를 불량소녀로 몰아 소년원에 보냈다는 사실이다. 억울함과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년만에 출소한 엘리노라가 또다시 어떤 흑인에게 심하게 강간당하자 어머니는 그 해 여름 딸을 뉴욕으로 데려갔다. 이로써 엘리노라의 생애에서 정규교육은 국민학교 5학년으로 끝나고 말았다.
 
 
 
엘리노라는 어머니처럼 백인집에서 하녀로 일하다가 주인 여자와 말다툼을 벌이고 쫏겨났다. 모녀는 살아야 했고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딸을 할렘의 포주에게 맡겼다. 열네살 계집아이는 창녀가 되었다. 물론 자기가 하는 행위의 의미는 몰랐다. 하녀 월급보다 많은 주급(15달러)을 번다는 것과 예쁜 속옷을 입고, 영화에서나 보던 흰색 전화기를 머리맡에 두었다는 사실에 더없이 만족했을 뿐이다. 평생 처음 누려보는 사치와 풍족이었다.
 
그러나 무었이든 엘리노라가 좋다고 여기는 것은 곁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었다. 얼마 못 가 그녀는 건달패가 보낸 손님을 거절했다가 그들에게 넘겨졌다. 소녀는 열다섯살 나이에 벌써 두번째 철창 생활을 겪게 되었다. 붙잡혀 온 창녀들이 한 방에 50명씩 북적대는 감방생활을 마치고 바깥 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녀가 갈곳 이라곤 또다시 사창가 밖에 없었다. 얼마 후 엘리노라는 간신히 그곳으로부터 벗어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1931년 대공황은 모녀를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 갔다. 추위에 떨고 끼니를 못 잇는 데다 어머니까지 몸져 누운 최악의 상황이었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 밤. 밀린 방세 45달러를 마련하지 못하면 다음날 쫏겨난다는 절박감을 안고 엘리노라는 거리로 나섰다. 발길이 닿은 곳은 할렘가에 있는 '포즈와 제리즈'라는 나이트클럽. 그녀는 사정사정하여 지배인을 만나 댄서라고 속이고 일자리를 간청했다. 운 나쁘게 즉석에서 테스트를 하는 바람에 거짓말은 금방 들통 나고 말았다. 지배인이 노발대발하여 그녀를 내쫓으려 하는데 피아노 연주자가 불쑥 끼여들었다. "노래는 어때?" 단 한마디가 평생을 결정짓는 일이 이런 경우이리라. "노래요? 아,네 자신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큰 소리. 벼랑 끝에서 터져나온 환희의 절규였다. 지배인의 마음이 변할세라 엘리노라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곡을 신청했다. 잠시 후 피아노 반주에 맞춰 엘리노라의 노래 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하던 실내가 문득 조용해졌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만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훗날 그녀는 그 때를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뒤늦게 그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홀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만약 누가 핀이라도 하나 떨어뜨렸다면 그것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 같았을 것이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꿈같은 정적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느 자리에서는 술잔을 옆에 놓고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밤 피아니스트와 반을 나눈 그녀의 팁은 57달러나 되었다. 나이트클럽의 주급 18달러짜리 가수가 되자 엘리노라 홀리데이에게는 예명이 필요했다. 그 때 떠오른 이름이 오래전부터 흠모해 오던 여배우 빌리 도브. 재즈의 여왕 빌리 홀리데이는 이렇게 탄생했다. 빌리는 날마다 밤 12시부터 새벽까지 노래를 불렀다. 그 때 글래머걸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면 객석을 돌며 엉덩이를 흔들고 젖무덤이 보이도록 허리를 굽혀 탁자 위에 놓은 팁을 집었다. 이른바 '코튼 클럽'의 전성기였다. 그런데 빌리는 남에게 가슴을 보이기가 싫어 어정쩡한 자세로 돈을 집다가 번번이 그것을 떨어뜨렸다. 어느날 그녀가 자꾸 돈을 떨어뜨리자 보다 못한 한 부자 손님이 돈을 직접 손에 쥐어주었다. '귀한 손님이 돈을 직접 줄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 뒤로 빌리는 절대로 탁자에서 돈을 집지 않았다. 그러자 동료 가수들은 이렇게 비웃었다. "자기가 무슨 Lady(귀부인)나 된 줄 아는 모양이지." 이 때부터 빌리는 '레이디'라고 불렸다. 이곳에서 인기를 얻자 '레이디'는 차츰 할렘가의 여러 클럽에 출연하게 되었고 고정팬도 나날이 늘었다. 이 시절 그녀는 언제나 머리에 크고 흰 치자꽃 한송이를 꽃고 출연했는데 죽는 날까지 계속된 이 버릇 때문에 치자꽃은 '빌리 홀리데이의 전설'을 이루는 일부가 되었다.
 
 
 
 
하루는 열렬한 재즈 팬이자 음악 평론가인 존 허먼드가 빌리 앞에 나타났다. 두번째 찾아오던날 그는 유명한 클라리넷 연주자 베니 굿맨과 일류 매니저 조 그래이저를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1933년 열여덟 살 틴에이저 빌리는 굿맨의 반주로 첫 음반을 취입하게 되었다. 취입곡은 < 어머니의 사위>. 이 레코드가 기대한 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했는데도 1935년 하먼드는 다시 그녀로 하여금 유명한 '테디 윌슨 악단'의 보컬리스트로서 취입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두번째 레코드는 잘 팔렸는데 특히 해외 비평가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덕분에 이 해에 빌리는 에드 워드 엘링턴 (듀크 엘링턴)의 영화음악 <심포니 인 블랙>을 부르기도 했다. 그 무렵 흑인 연예인에게 거의 유일한 무대였던 아폴로 극장에서의 데뷔 무대도 대성공이었다. 1936년에 들어서자 빌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독집 디스크 <빌리 홀리데이 스토리-컬럼비아/CBS>를 내게 되었고 주로 '플레처 핸더슨 악단'과 함께 출연했다. 1937년 3월-1938년 2월에는 뉴욕에서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공연을 했는데 여기서 테너 색소폰의 1인자 레스터 영을 만나 그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레스터를 음악적으로 높히 평가한 빌리는 그를 '프레즈 (프레지던트 레스터)'라고 불렀으며 레스터는 그녀의 기품있는 몸가짐에 반해 닉네임 '레이디'에 홀리데이의 '데이를 합쳐 '레이디 데이'라고 불렀다.
 
 
 
 
이 존경심 어린 애칭은 그 뒤로 오늘날까지 빌리를 부르는 대명사가 되었다. 1937년 아티 쇼가 빌리를 찾아와 보스턴 연주 여행을 제의했다. 흑인 여성 가수와 백인 악사 13명을 한무대에 내세우려는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였다. '아티 쇼 악단'의 모험적인 순회 연주는 흥행 면에서는 그런대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행 내내 심각한 인종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세인트 루이스에서는 "백인 악단에서 흑인 가수를 쓰면 안된다"며 공연을 제지했고 뉴욕에서는 공연하는 호텔에서조차 빌리를 부엌문으로만 드나들도록 강요했다. 예전에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공했을때 '흑인 밴드와 공연하기에는 얼굴이 너무 희다'며 빌리의 얼굴에 검댕이 칠을 했던 디트로이트 극장에서는 이번에는 '백인 밴드와 공연하기에는 너무 검다' 며 핑크 물감을 강제로 칠했다. 노래 도중에 백인들로부터 야유받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공연할 때만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일단 공연이 끝나 거리로 나오면 그때부터 빌리는 가수가 아니라 백인 일행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단지 한마리 '검둥개'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뒷골목 식당에서 조차도 그녀는 일행과 분리되어 쫏겨났고 잠잘곳을 구하지 못해 홀로 밤거리를 몇시간씩 헤메야했다. 어디를 가나 위압적인 적대감과 모멸적인 인종차별이 빌리 한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단원들이 아무리 애를써도 두터운 인종차별 관습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연주여행은 빌리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화근으로 작용했다. 온갖 차별과 위협에 시달리던 나머지 그녀는 10대 시절 어쩌다 피웠던 마리화나를 여행 기간 내내 손에서 놓지않게 되었던 것이다. 깊은 상처를 안고 돌아온 빌리는 악단과 함께 전국 라디오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으나 막상 방송때에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제지당했다. 마음의 상처는 끝없이 이어졌다. 1937년 2월에는 빌리가 가수가 된 뒤로 연락이 오가던 그녀의 아버지가 남부순회 공연 도중 폐렴에 걸려 죽었다. 그는 빈사 상태로 병원을 전전했으나 인종차별이 극심한 댈러스에서 흑인에게 문을 열어 준병원은 한군데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시련이 밑거름이 되었는지 1939년에 이르자 빌리의 노래는 한층 원숙해졌다. 이 해의 신곡 가운데 가장 걸출한 곡은 <기묘한 과일> 시인 루이스 앨런이 그녀를 위해 지은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린치당한 흑인이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광경을 묘사한 내용이다. 그 흑인의 처지가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음인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빌리는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앨런의 또 한 작품은 <신은 어린이를 축복한다> 이 또한 흑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린치를 반대하는 내용이다. 빌리는 1939년01940년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카페 '소사이어티 다운타운'에 출연하였는데 이 두곡을 한번도 빼지않고 불렀다. God Bless the child< 신은 어린이를 축복한다>는 빌리의 독특한 해석에 따라 재창조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가수도 그녀를 능가할 수 없는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로 인정받고 있다.
 
빌리가 못 부르게 한 것이 아니라 청중이 허락하지 않았다. 언젠가 카페 소사이어티에서 어떤 가수가 기타를 치면서 이 노래를 부르자 사람들 이 당장 집어치우라며 그를 끌어내린 일도 있었다. 빌리는 이 노래들을 부를 차례가 되면 스테이지에서 내려와 객석으로 가까이 다가가곤 했다. 노래하는 동안에도 손가락으로 깊은 고뇌에 잠긴 듯한 모습을 나타내 다른 가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관객의 뇌리에 새겨 주었다. 유명한 소설가 '릴리어 스미스' 여사가 이 노래에서 받은 진한 감동을 글로 옮긴 소설 <기묘한 과일>은 1944년 미국 최고의 배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1940년대는 빌리의 전성기였다. 1944년에는 '에스콰이어 재즈 비평가상' 1946년에는 '올해의 메트로놈 보컬리스트상'을 받았다. 공연 일정은 빡빡했고 대중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갔다.
 
 
 

오늘날 빌리를 모던재즈 보컬의 선구자라고 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빌리는 언제나 자신이 부르고 싶은 곡만 자기가 느낀대로 불렀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다듬으려고 애쓰지 않은 솔직함과 그녀만의 필링이 있다. "나는 어렸을때 들은 베시 스미스나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빼고는 그 이전이나 이후에 어느 누구의 영향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단지 베시의 비음과 루이스의 필링을 원했다. 때때로 사람들이 내 스타일은 어디서 발전했냐고 묻는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만일 여기 어떤 곡이 있어 그것을 부르고 싶다고 하자. 사람들은 어떻게 부를까에 신경을 쓰겠지만 나는 단지 느끼려고 할 뿐이다. 그 느낌을 그대로 솔직하게 노래하면 듣는 사람도 뭔가를 느끼지 않겠는가? 생각,편곡,연습 따위는 필요없었다. 오직 느낄 수 있는 곡만이 필요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감동한 나머지 노래를 부를 수조차 없는 곡도 있었다". 그렇다면 빌리가 갖는 느낌은어디서 우러난 것일까? 그것은 노래의 가사에서 자신이 체험한 것들을 발견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랑이라든가 배고픔이라는 낱말을 절절하게 노래하는 가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캐딜락과 밍크 코트를 풀리지 않은 체험 그것으로 깨달은 것이 바로 이 두 낱말안에 들어있다"... 노랫말과 자신의 체험이 일치되면서 가슴 밑바닥에서 부터 공감한 그 필링은 그대로 멜로디로 이어진다. 그러나 때로는 격정에 휩쓸 린 나머지 본디의 멜로디를 벗어나야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있다. 화려했던 1940년대는 다른 한편으로는 빌리의 개인적인 고뇌와 문제점이 가장 부각된 시기이기도 하다. 언제나 정에 굶주렸던 그녀는 1932년 '스윙의 제왕 ' 벤저민(베니) 굿맨과의 순수한 교제와 1939년 감독이자 배우인 오손 웰스와의 사랑이 백인들의 훼방과 협박으로 무산되자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가까스로 상처가 아물어 가던 1941년 캘리포니아에서 나이트 클럽 메니져인 제임스 먼로를 만나 결혼을 했으나 알고보니 그는 바람둥이에 아편 중독자였다. 이렇게 되자 빌리의 첫번째 결혼은 평탄치 못했다.

 

 
여기에 모친상마저 당해 마음의 평정을 잃은 그녀는 마약에 깊이 빠지는 한편 1945년에는 트럼펫 연주자인 조셉 가이와 1년 남짓 간통 행각을 벌일 만큼 자신을 걷잡지 못했다. 1947년 봄, 빌리는 마약을 끊기로 결심하고 맨하탄에 있는 개인 요양원을 찾았다. 3주일에 2천달러라는 큰 액수였지만 철저한 비밀보장이 조건이었으므로 안심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3주일 후 그곳을 나설때 그녀의 뒤에는 병원측의 밀고를 받고 나온 마약단속반원이 뒤따르고 있었다. 결국 빌리는 마약 상습복용자 명단에 올라 평생 그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고 만다. 5월 27일 빌리는 필라델피아 지방법원에서 마약법 위반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고 웨스트 버지니아의 연방 여성 교도소에서 9개월간 복역했다. 출옥한 뒤 가진 카네기 홀 컴백 공연에서 그녀는 열광적인 호응을 받아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뉴욕시는 마약전과자라는 이유로 나이트클럽 공연 허가를 내주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전국을 떠돌며 노래를 불러야 했다. 가는 곳마다 대성황이었고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 했지만 새 남편 존 레비의 농간으로 빌리는 언제나 빈털터리 신세였다. 게다가 또 한번의 마약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1950년에 레비와도 헤어진 그녀는 다음해 루이스 매케이를 메니져 겸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심기일전한 빌리는 1950년 초 잇달아 디스크를 출반하고 정력적으로 무대에도 섰고 텔레비젼에도 출연했다. 1954년에는 서유럽 순회공연에 나서 하룻밤에 세번이나 공연하는 기록을 세울 만큼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 앞에는 음악회나 클럽 출연등 꽉짜인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은 그녀 곁에서 조금도 물러설 줄을 몰랐다. 1956년 합법적으로 결혼한 빌리와 매케이는 1957년 누군가의 밀고에 의해 각각 마약소지와 무기소지 혐의로 필라델피아에서 체포당했다. 다섯번째 감옥행이었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오기는 했지만 수년에 걸친 정서 불안과 음주.마약으로 인한 육체적 피폐로 빌리의 겉모습이나 목소리는 이미 예전같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그녀는 무리하게 공연과 취입을 계속했다. 1959년 봄 빌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병원에 입원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심지가 이미 다 타버렸슴을 알고 있었다. 병원 침대 위에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체포되었다. 마약을 소지하고 있으라라는 추정 아래 이루어진 과잉 조처였다.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검둥이의 인권을 경찰은 아무 거리낌 없이 짓밟았다. 병원의 의사나 간호원들은 진료 기록판에 엘리노라 페이건이라고 적힌 이 환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들은 마약으로 몸을 망친 흑인 여자에게 눈곱만치도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발작을 일으키면 마지못해 진정제를 주사해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1959년 7월 17일 밑바닥 인생의 한과 평등을 갈망하는 검은 영혼들의 메시지를 전하던 위대한 가수는 차가운 독방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마흔네살인데도 80대 노인처럼 쇠잔해 보이는 주검... 침대 머리에 걸린 진료 기록판에는 '병명 :마약 중독 말기 증상 치료 방법 : 없음' 이라는 글씨가 휘갈겨져 있었다. 빌리 홀리데이... 그녀에게 지금까지 쏟아지는 찬사와 사랑은 그녀의 숙명이랄 인생에 대한 작은 보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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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항해 >

 

 


아리조나 해협 건너  큰 바위, 작은 바위

가슴까지 덮치는 물결 지나서

널 만나러가

18번 국도 지나, 바람 지나, 물결 지나,

한잔만 하고 가라던 그 손 뿌리치고

널 만나러 가

 


워~~~~~~

Hey, Hey! Listen to me man!

You must be here in Arizona!

Come on here! Come on here! Come on here!

Ok, man, Ok!

 


아리조나 부르는 대로

저 물결이 나에게 원하는 대로

졸졸졸졸졸 흐르는 저 물길은

내 갈 길을 인도 하네

내가 찾는 동네 변두리 아직까지 간판이 전혀 없구나.

나 혼자 방황하고 정처 없이 이곳을 헤매다가

아리조나 숨겨진 보물을 찾네.

오늘도 하염없이 나는 정처 없이 이곳을 헤매지

아리조나 해협을 걷네.

 


워~~

Hey, Hey! Listen to me man!

You must be here in Arizona!

Come on here! Come on here! Come on here!

Ok, man, Ok!

 


길을 걷다 마주치는 그 얼굴들

다정한 듯 오늘도 얘길 나눴지

제법 거친 물결도 이미 나와 친해진 듯 해

오늘도 난 아리조나 해협을 걷네.












서핑중 우연히 목격한 권우유님의 '위대한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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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

2010. 3. 9. 04:28 from 마이 페이보릿/두개의 달


뒤샹을 숭배하는사람들은 뒤샹의 신비스러운 겸손함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느끼곤 한다
그는 추앙을 받으면서도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며,
자기 방어적인 면도 없고, 정중하며, 속임수에 전혀 오염되지 않았고, 일종의 호기심마저 불러일으킨다 프랑스적인 세련됨을 갖춘 뒤샹은 수준과 상관없이 어떠한 대화도 나눌 수 있으며,
어떤 대화 내용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언제 어디서나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예술계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음을 밝히고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부터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인생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오는 인생에 대한 유감없음이 아마 뒤샹을 충분히 신비로운 사람으로 비추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뒤샹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술작품을 제작한 적은 별로 없다
그는 예술과 일상과의 경계를 허물려는 의도 없이도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손쉽게 허물어버렸다
이를테면 뒤샹이 자전거 바퀴를 둥근 의자 위에 거꾸로 설치했을 때에도 그저 단순한 오락으로 생각했다 그는 그것을 만들어야 할 특별한 이유도, 전시할 의도도, 설명할 생각도 없었다
뒤샹은 미술사에서 피카소와 더불어서 가장 도전적이며 모험적인 예술가로 손꼽힌다
그는 작품활동을 별로 하지 않으면서도 현대미술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주 기이한 예술가였다
이렇다면 아마 뒤샹은 흔히들 자신의 귀를 자른 고흐같이 뭔가가 운명적인 미친 예술가이거나 한눈에 딱 예술가라고 알아볼만큼의 예술적인 화가의 모습을 하고있다거나
당대가 알아주지 못해 아주 가난하거나 혹은 당대의 찬사를 받아 매우 부자이거나 으례 미술사에 영향을 끼친 예술가라면 예술가 특유의 그런 생활이나 편력같은 것이 있을 법도 한데,
뒤샹은 일반인처럼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예술가치고는 또 한편으로는 독특한 삶을 살았다
불어 교습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며 체스를 무척이나 즐겼던 뒤샹 뒤샹은 자신을 반쯤 신으로 착각하는 예술가의 권위의식이나 특권의식을 경멸했다
그는 레디메이드를 예술로 둔갑시켜, 미술계에 회화이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한 실험적인 예술가이지만, 평생을 거의 은둔하다시피 하면서 체스를 두는 일로 보냈다
그는 그의 말 그대로, '그저 체스를 두는 예술가' 뿐이였다

<출처  http://yuridol.egloos.com/379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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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바퀴> 1951년









 <숨겨진 소리> 1916, 레디메이드, 12.9X13X11.4cm










<샘> 1917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년 7월 28일 ~ 1968년 10월 2일)은
프랑스의 예술가로, 다다이즘초현실주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1955년에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뒤샹의 작품과 아이디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많은 근대 미술 수집가에게 한 조언은 수집가들이 서양 미술 세계의 취향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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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축은 소리도없이 천천히 회전하고
그녀와 나의 체온은 세상속에서
조용히 계속 열을 빼앗기고 있었다"

 




신카이마코토  '그녀와그녀의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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