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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10 빌 리 홀 리 데 이






<  Billie Holiday - Strange Fruit >





Billie Holiday Billie Holiday (1915~1959) 사람들은 흔히 좋지 못한 운세를 두고 핑계 섞인 체념으로 '숙명' 이라는 이름을 붙이곤 한다. 그러나 박복한 재즈 뮤지션들에서도 굴곡이 유난히 심한 인물이 있다.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한 흑인 여성의 삶을 놓고 본다면 '숙명'이란 단어만으로도 그 불우한 인생을 표현할 길이 없을 듯하다. 자기 뜻과 상관없이 떠맡겨진 것이 아닌 다음에야 그녀처럼 슬픈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 또 있을지 의문이다.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가수 라 일컬어지는 빌리 홀리데이... 그녀의 목소리에는 영감이 넘쳤으며 성량의 풍부함에서 아무도 넘볼 수 없었다. 그녀의 노래를 듣거나 함께 공연했던 사람 같은 시대의 위대한 라이벌이었던 엘라 피츠제럴드 매리언 앤더슨 마할리아 잭슨, 사라 본 조차도 기억한다. 빌리가 얼마나 천부 적인 감각으로 곡을 해석하여 멜로디와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지를...
 

사람들은 그 같은 창의력에 곧잘 도취되었으며 음역의 한계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유연한 발성과 필링 저음에서의 허스키한 잿빛 색조, 고음에서의 매끄러운 양감 마지막 부분을 부드럽게 떠는 서정적 비브라토 그리고 짙은 호소력에 홀린 듯이 사로잡혔다. 이 모든것들의 밑바탕에 깔린 저 어둡고 눅눅한 흑인의 설움 순간순간 타오르던 불꽃 은 정열...

 
그러나 이 대스타의 44년 밖에 안 되는 짧은 인생에서 젖먹이 시절을 뺀 41년은 굶주림,노동, 성폭행, 매춘 인종 차별, 마약중독, 감옥생활, 실연, 이혼 등 끝없는 멸시와 수치와 자포자기로 얼룩진 세월이었다. 평화와 안식은 어느날 아무도 모르게 병든 들개처럼 죽어간 뒤에야 찾아왔다. 빌리 홀리데이... 슬픈 목소리를 지니고 태어나 숙명인 양 슬픈 노래를 부른 여자... 진흑탕에 피어났다 스러진 한송이 치자꽃... 빌리 홀리데이는 1915년 4월 7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열여섯살 밖에 안 먹은 클래런스 홀리데이 어머니는 열 세살 소녀 새디 페이건 아기는 태어나서 어머니의 성을 따 엘리노라 페이건이라 불렸으나 3년이 지나 부모가 결혼하자 홀리데이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빌리라는 이름은 훗날 밤무대 시절에 만들어진 예명이다.
 
 
 
빌리의 어머니(13살)는 만삭이 되자 하녀로 일하던 집에서 쫒겨났다. 어쩌어찌 아이를 낳아 시댁으로 들어갔으나 비교적 잘사는 흑인 집안이었던 아버지(16살)의 부모로부터도 말 못할 홀대를 받았다. 그럭저럭 버티면서 3년뒤 결혼을 했으나 기타와 벤조 연주자였던 남편은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오자 유랑 악단을 따라 훌쩍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이혼했고, 또 각각 재혼했다. 불운하게도 두번째 남편마저 잃고 과부가 되자 빌리의 어머니는 식모살이를 하러 뉴욕으로 떠났다. 철부지 불장난의 업보를 가난한 친정에 떠맡기고 어린 엘리노라는 이렇게 하여 거부하는 몸짓조차 해보지 못한 채 어머니로부터 "불행"의 배턴을 이어받게 되었다.
 
 
 
홀로 남겨진 엘리노라는 1백살이 가까워 약간 노망기가 있는 증조외할머니와 따뜻한 정을 주고 받았으나 이것도 잠깐 할머니는 어느날 잠든 엘리노라의 목을 감싸안은 채 숨을 거두었다. 잠에서 깬 아이는 딱딱하게 굳은 할머니의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울어대다 이웃 사람들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이 충격으로 아이는 한 달간 입원했다. 열살도 되기 전부터 엘리노라는 학교에 다니면 서 오후에는 닥치는대로 허드렛일을 해 돈을 벌어야 했다. 몸집이 컸으므로 꽤 멀리까지 심부름을 가기도 했는데 이 때 우연히 사창가를 지나다가 축음기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루이 암스트롱이나 스미스가 부르는 재즈와 블루스였다. 첫 순간부터 그것들은 어린 소녀의 마음을 뭉클 사로잡았다.
 
 
 
아이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집으로 찾아 들어가 아무 일이고 할 테니 음악을 들려 달라고 사정했다. 그 뒤로는 앉으나 서나 어디에 있든지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랫말의 뜻이 뭔지는 잘 몰랐지만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후련해졌다. 아이는 어느덧 당시에 불리는 재즈들의 가사를 다 외우고 정확히 따라서 부르게끔 되었다.
 
 
 
 
1925년 열살 나던 해 엘리노라는 처음으로 끔직한 고통을 맛보았다. 일을 해주던 집에서 마흔살이 넘은 백인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것은, 경찰이 도리어 엘리노라를 불량소녀로 몰아 소년원에 보냈다는 사실이다. 억울함과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년만에 출소한 엘리노라가 또다시 어떤 흑인에게 심하게 강간당하자 어머니는 그 해 여름 딸을 뉴욕으로 데려갔다. 이로써 엘리노라의 생애에서 정규교육은 국민학교 5학년으로 끝나고 말았다.
 
 
 
엘리노라는 어머니처럼 백인집에서 하녀로 일하다가 주인 여자와 말다툼을 벌이고 쫏겨났다. 모녀는 살아야 했고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딸을 할렘의 포주에게 맡겼다. 열네살 계집아이는 창녀가 되었다. 물론 자기가 하는 행위의 의미는 몰랐다. 하녀 월급보다 많은 주급(15달러)을 번다는 것과 예쁜 속옷을 입고, 영화에서나 보던 흰색 전화기를 머리맡에 두었다는 사실에 더없이 만족했을 뿐이다. 평생 처음 누려보는 사치와 풍족이었다.
 
그러나 무었이든 엘리노라가 좋다고 여기는 것은 곁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었다. 얼마 못 가 그녀는 건달패가 보낸 손님을 거절했다가 그들에게 넘겨졌다. 소녀는 열다섯살 나이에 벌써 두번째 철창 생활을 겪게 되었다. 붙잡혀 온 창녀들이 한 방에 50명씩 북적대는 감방생활을 마치고 바깥 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녀가 갈곳 이라곤 또다시 사창가 밖에 없었다. 얼마 후 엘리노라는 간신히 그곳으로부터 벗어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1931년 대공황은 모녀를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 갔다. 추위에 떨고 끼니를 못 잇는 데다 어머니까지 몸져 누운 최악의 상황이었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 밤. 밀린 방세 45달러를 마련하지 못하면 다음날 쫏겨난다는 절박감을 안고 엘리노라는 거리로 나섰다. 발길이 닿은 곳은 할렘가에 있는 '포즈와 제리즈'라는 나이트클럽. 그녀는 사정사정하여 지배인을 만나 댄서라고 속이고 일자리를 간청했다. 운 나쁘게 즉석에서 테스트를 하는 바람에 거짓말은 금방 들통 나고 말았다. 지배인이 노발대발하여 그녀를 내쫓으려 하는데 피아노 연주자가 불쑥 끼여들었다. "노래는 어때?" 단 한마디가 평생을 결정짓는 일이 이런 경우이리라. "노래요? 아,네 자신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큰 소리. 벼랑 끝에서 터져나온 환희의 절규였다. 지배인의 마음이 변할세라 엘리노라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곡을 신청했다. 잠시 후 피아노 반주에 맞춰 엘리노라의 노래 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하던 실내가 문득 조용해졌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만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훗날 그녀는 그 때를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뒤늦게 그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홀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만약 누가 핀이라도 하나 떨어뜨렸다면 그것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 같았을 것이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꿈같은 정적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느 자리에서는 술잔을 옆에 놓고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밤 피아니스트와 반을 나눈 그녀의 팁은 57달러나 되었다. 나이트클럽의 주급 18달러짜리 가수가 되자 엘리노라 홀리데이에게는 예명이 필요했다. 그 때 떠오른 이름이 오래전부터 흠모해 오던 여배우 빌리 도브. 재즈의 여왕 빌리 홀리데이는 이렇게 탄생했다. 빌리는 날마다 밤 12시부터 새벽까지 노래를 불렀다. 그 때 글래머걸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면 객석을 돌며 엉덩이를 흔들고 젖무덤이 보이도록 허리를 굽혀 탁자 위에 놓은 팁을 집었다. 이른바 '코튼 클럽'의 전성기였다. 그런데 빌리는 남에게 가슴을 보이기가 싫어 어정쩡한 자세로 돈을 집다가 번번이 그것을 떨어뜨렸다. 어느날 그녀가 자꾸 돈을 떨어뜨리자 보다 못한 한 부자 손님이 돈을 직접 손에 쥐어주었다. '귀한 손님이 돈을 직접 줄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 뒤로 빌리는 절대로 탁자에서 돈을 집지 않았다. 그러자 동료 가수들은 이렇게 비웃었다. "자기가 무슨 Lady(귀부인)나 된 줄 아는 모양이지." 이 때부터 빌리는 '레이디'라고 불렸다. 이곳에서 인기를 얻자 '레이디'는 차츰 할렘가의 여러 클럽에 출연하게 되었고 고정팬도 나날이 늘었다. 이 시절 그녀는 언제나 머리에 크고 흰 치자꽃 한송이를 꽃고 출연했는데 죽는 날까지 계속된 이 버릇 때문에 치자꽃은 '빌리 홀리데이의 전설'을 이루는 일부가 되었다.
 
 
 
 
하루는 열렬한 재즈 팬이자 음악 평론가인 존 허먼드가 빌리 앞에 나타났다. 두번째 찾아오던날 그는 유명한 클라리넷 연주자 베니 굿맨과 일류 매니저 조 그래이저를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1933년 열여덟 살 틴에이저 빌리는 굿맨의 반주로 첫 음반을 취입하게 되었다. 취입곡은 < 어머니의 사위>. 이 레코드가 기대한 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했는데도 1935년 하먼드는 다시 그녀로 하여금 유명한 '테디 윌슨 악단'의 보컬리스트로서 취입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두번째 레코드는 잘 팔렸는데 특히 해외 비평가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덕분에 이 해에 빌리는 에드 워드 엘링턴 (듀크 엘링턴)의 영화음악 <심포니 인 블랙>을 부르기도 했다. 그 무렵 흑인 연예인에게 거의 유일한 무대였던 아폴로 극장에서의 데뷔 무대도 대성공이었다. 1936년에 들어서자 빌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독집 디스크 <빌리 홀리데이 스토리-컬럼비아/CBS>를 내게 되었고 주로 '플레처 핸더슨 악단'과 함께 출연했다. 1937년 3월-1938년 2월에는 뉴욕에서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공연을 했는데 여기서 테너 색소폰의 1인자 레스터 영을 만나 그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레스터를 음악적으로 높히 평가한 빌리는 그를 '프레즈 (프레지던트 레스터)'라고 불렀으며 레스터는 그녀의 기품있는 몸가짐에 반해 닉네임 '레이디'에 홀리데이의 '데이를 합쳐 '레이디 데이'라고 불렀다.
 
 
 
 
이 존경심 어린 애칭은 그 뒤로 오늘날까지 빌리를 부르는 대명사가 되었다. 1937년 아티 쇼가 빌리를 찾아와 보스턴 연주 여행을 제의했다. 흑인 여성 가수와 백인 악사 13명을 한무대에 내세우려는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였다. '아티 쇼 악단'의 모험적인 순회 연주는 흥행 면에서는 그런대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행 내내 심각한 인종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세인트 루이스에서는 "백인 악단에서 흑인 가수를 쓰면 안된다"며 공연을 제지했고 뉴욕에서는 공연하는 호텔에서조차 빌리를 부엌문으로만 드나들도록 강요했다. 예전에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공했을때 '흑인 밴드와 공연하기에는 얼굴이 너무 희다'며 빌리의 얼굴에 검댕이 칠을 했던 디트로이트 극장에서는 이번에는 '백인 밴드와 공연하기에는 너무 검다' 며 핑크 물감을 강제로 칠했다. 노래 도중에 백인들로부터 야유받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공연할 때만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일단 공연이 끝나 거리로 나오면 그때부터 빌리는 가수가 아니라 백인 일행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단지 한마리 '검둥개'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뒷골목 식당에서 조차도 그녀는 일행과 분리되어 쫏겨났고 잠잘곳을 구하지 못해 홀로 밤거리를 몇시간씩 헤메야했다. 어디를 가나 위압적인 적대감과 모멸적인 인종차별이 빌리 한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단원들이 아무리 애를써도 두터운 인종차별 관습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연주여행은 빌리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화근으로 작용했다. 온갖 차별과 위협에 시달리던 나머지 그녀는 10대 시절 어쩌다 피웠던 마리화나를 여행 기간 내내 손에서 놓지않게 되었던 것이다. 깊은 상처를 안고 돌아온 빌리는 악단과 함께 전국 라디오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으나 막상 방송때에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제지당했다. 마음의 상처는 끝없이 이어졌다. 1937년 2월에는 빌리가 가수가 된 뒤로 연락이 오가던 그녀의 아버지가 남부순회 공연 도중 폐렴에 걸려 죽었다. 그는 빈사 상태로 병원을 전전했으나 인종차별이 극심한 댈러스에서 흑인에게 문을 열어 준병원은 한군데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시련이 밑거름이 되었는지 1939년에 이르자 빌리의 노래는 한층 원숙해졌다. 이 해의 신곡 가운데 가장 걸출한 곡은 <기묘한 과일> 시인 루이스 앨런이 그녀를 위해 지은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린치당한 흑인이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광경을 묘사한 내용이다. 그 흑인의 처지가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음인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빌리는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앨런의 또 한 작품은 <신은 어린이를 축복한다> 이 또한 흑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린치를 반대하는 내용이다. 빌리는 1939년01940년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카페 '소사이어티 다운타운'에 출연하였는데 이 두곡을 한번도 빼지않고 불렀다. God Bless the child< 신은 어린이를 축복한다>는 빌리의 독특한 해석에 따라 재창조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가수도 그녀를 능가할 수 없는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로 인정받고 있다.
 
빌리가 못 부르게 한 것이 아니라 청중이 허락하지 않았다. 언젠가 카페 소사이어티에서 어떤 가수가 기타를 치면서 이 노래를 부르자 사람들 이 당장 집어치우라며 그를 끌어내린 일도 있었다. 빌리는 이 노래들을 부를 차례가 되면 스테이지에서 내려와 객석으로 가까이 다가가곤 했다. 노래하는 동안에도 손가락으로 깊은 고뇌에 잠긴 듯한 모습을 나타내 다른 가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관객의 뇌리에 새겨 주었다. 유명한 소설가 '릴리어 스미스' 여사가 이 노래에서 받은 진한 감동을 글로 옮긴 소설 <기묘한 과일>은 1944년 미국 최고의 배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1940년대는 빌리의 전성기였다. 1944년에는 '에스콰이어 재즈 비평가상' 1946년에는 '올해의 메트로놈 보컬리스트상'을 받았다. 공연 일정은 빡빡했고 대중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갔다.
 
 
 

오늘날 빌리를 모던재즈 보컬의 선구자라고 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빌리는 언제나 자신이 부르고 싶은 곡만 자기가 느낀대로 불렀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다듬으려고 애쓰지 않은 솔직함과 그녀만의 필링이 있다. "나는 어렸을때 들은 베시 스미스나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빼고는 그 이전이나 이후에 어느 누구의 영향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단지 베시의 비음과 루이스의 필링을 원했다. 때때로 사람들이 내 스타일은 어디서 발전했냐고 묻는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만일 여기 어떤 곡이 있어 그것을 부르고 싶다고 하자. 사람들은 어떻게 부를까에 신경을 쓰겠지만 나는 단지 느끼려고 할 뿐이다. 그 느낌을 그대로 솔직하게 노래하면 듣는 사람도 뭔가를 느끼지 않겠는가? 생각,편곡,연습 따위는 필요없었다. 오직 느낄 수 있는 곡만이 필요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감동한 나머지 노래를 부를 수조차 없는 곡도 있었다". 그렇다면 빌리가 갖는 느낌은어디서 우러난 것일까? 그것은 노래의 가사에서 자신이 체험한 것들을 발견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랑이라든가 배고픔이라는 낱말을 절절하게 노래하는 가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캐딜락과 밍크 코트를 풀리지 않은 체험 그것으로 깨달은 것이 바로 이 두 낱말안에 들어있다"... 노랫말과 자신의 체험이 일치되면서 가슴 밑바닥에서 부터 공감한 그 필링은 그대로 멜로디로 이어진다. 그러나 때로는 격정에 휩쓸 린 나머지 본디의 멜로디를 벗어나야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있다. 화려했던 1940년대는 다른 한편으로는 빌리의 개인적인 고뇌와 문제점이 가장 부각된 시기이기도 하다. 언제나 정에 굶주렸던 그녀는 1932년 '스윙의 제왕 ' 벤저민(베니) 굿맨과의 순수한 교제와 1939년 감독이자 배우인 오손 웰스와의 사랑이 백인들의 훼방과 협박으로 무산되자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가까스로 상처가 아물어 가던 1941년 캘리포니아에서 나이트 클럽 메니져인 제임스 먼로를 만나 결혼을 했으나 알고보니 그는 바람둥이에 아편 중독자였다. 이렇게 되자 빌리의 첫번째 결혼은 평탄치 못했다.

 

 
여기에 모친상마저 당해 마음의 평정을 잃은 그녀는 마약에 깊이 빠지는 한편 1945년에는 트럼펫 연주자인 조셉 가이와 1년 남짓 간통 행각을 벌일 만큼 자신을 걷잡지 못했다. 1947년 봄, 빌리는 마약을 끊기로 결심하고 맨하탄에 있는 개인 요양원을 찾았다. 3주일에 2천달러라는 큰 액수였지만 철저한 비밀보장이 조건이었으므로 안심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3주일 후 그곳을 나설때 그녀의 뒤에는 병원측의 밀고를 받고 나온 마약단속반원이 뒤따르고 있었다. 결국 빌리는 마약 상습복용자 명단에 올라 평생 그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고 만다. 5월 27일 빌리는 필라델피아 지방법원에서 마약법 위반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고 웨스트 버지니아의 연방 여성 교도소에서 9개월간 복역했다. 출옥한 뒤 가진 카네기 홀 컴백 공연에서 그녀는 열광적인 호응을 받아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뉴욕시는 마약전과자라는 이유로 나이트클럽 공연 허가를 내주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전국을 떠돌며 노래를 불러야 했다. 가는 곳마다 대성황이었고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 했지만 새 남편 존 레비의 농간으로 빌리는 언제나 빈털터리 신세였다. 게다가 또 한번의 마약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1950년에 레비와도 헤어진 그녀는 다음해 루이스 매케이를 메니져 겸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심기일전한 빌리는 1950년 초 잇달아 디스크를 출반하고 정력적으로 무대에도 섰고 텔레비젼에도 출연했다. 1954년에는 서유럽 순회공연에 나서 하룻밤에 세번이나 공연하는 기록을 세울 만큼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 앞에는 음악회나 클럽 출연등 꽉짜인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은 그녀 곁에서 조금도 물러설 줄을 몰랐다. 1956년 합법적으로 결혼한 빌리와 매케이는 1957년 누군가의 밀고에 의해 각각 마약소지와 무기소지 혐의로 필라델피아에서 체포당했다. 다섯번째 감옥행이었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오기는 했지만 수년에 걸친 정서 불안과 음주.마약으로 인한 육체적 피폐로 빌리의 겉모습이나 목소리는 이미 예전같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그녀는 무리하게 공연과 취입을 계속했다. 1959년 봄 빌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병원에 입원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심지가 이미 다 타버렸슴을 알고 있었다. 병원 침대 위에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체포되었다. 마약을 소지하고 있으라라는 추정 아래 이루어진 과잉 조처였다.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검둥이의 인권을 경찰은 아무 거리낌 없이 짓밟았다. 병원의 의사나 간호원들은 진료 기록판에 엘리노라 페이건이라고 적힌 이 환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들은 마약으로 몸을 망친 흑인 여자에게 눈곱만치도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발작을 일으키면 마지못해 진정제를 주사해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1959년 7월 17일 밑바닥 인생의 한과 평등을 갈망하는 검은 영혼들의 메시지를 전하던 위대한 가수는 차가운 독방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마흔네살인데도 80대 노인처럼 쇠잔해 보이는 주검... 침대 머리에 걸린 진료 기록판에는 '병명 :마약 중독 말기 증상 치료 방법 : 없음' 이라는 글씨가 휘갈겨져 있었다. 빌리 홀리데이... 그녀에게 지금까지 쏟아지는 찬사와 사랑은 그녀의 숙명이랄 인생에 대한 작은 보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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