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대만은 한국의 단교에 대해서 유독 서운해 할까?


지난 금요일 필자(최창근)은 현재 공부하고 있는 국립정치대학 한국어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한국인 교수 한분으로 부터 한가지 요청을 받았다. 요지는 "대만이 1992년 한국의 단교 사태에 대해서 유독 서운해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며, 미국, 일본등 다른 나라들의 단교 당시의 상황은 어떠 했는가? 에 대해서 설명을 해 달라"는 것 이었다. 비록 필자는 정치외교학 전공자도 중국학 전공자도 아니지만, 꽤 오래전 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온 사실을 아시기에, 아마추어인 필자에게 그분께서 그러 요청을 해 오신 것이었다.

 

그런 후 다음날인 토요일 필자와 그 분이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그 교수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설명을 요청하신 직접적인 배경에는 대만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그 분의 따님이 수업시간에 친구들로 부터 한국-대만의 단교 사태에 대해서, "대만은 한국의 신의와 은혜를 배신하였고, 당시 대만(중화민국)의 주한국 대사관이 있던 명동 일대에 있는 기업들은 상당수 대만 소유 였으며, 대만이 한국을 도와 그런 기업들도 세우고 큰 빌딩들도 세워 준 은혜(?)를 베풀었는데, 한국은 은혜를 저버리고 대만과 단교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아버지에게 사실이 그런지? 왜 대만이 한국에 대해서 그렇게 서운하게 생각하는지? 에 대해서 문의를 해 온 사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교수의 따님은 자신의 친구들이 부모로 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이런 의문을 제기 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수년째 대만에 거주하시는 그 교수께서 평소 대만의 지인들로 부터 한국에 대해 유독 서운한 감정을 많이 느낀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본인도 좀더 알고 있어야 겠다는 생각에, 이 문제에 관심이 많은 아마추어인 필자에게 이 점에 대해서 문의해 오신 것이었다.

 

1992년 단교 사태 이후, 대만정부 및 국민들이 한국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품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의문은 왜? 한국에 대해서만 유독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 응어리진 감정이 완전해 해소 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에 있다. 그래서 이문제에 대해서 그동안 정리한 사실들과 이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에 대해서 이번 글에서는 다루도록 한다.

 

1992년 8월 단교 당시 대만 측이 한국 측에 악감정을 가지게 된 원인으로는 당시 '한국 정부의 세련되지 못 한 일처리'를 들 수 있다. 분단국가인 한국 입장에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주요 무역대상국으로 부상하던 중국과 수교를 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운 중국측의 입장을 수용하여 대만과 단교 하면서 불필요하게 대만 측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 또한 사실.

 

1992년 단교 이전 한국-대만 관계가 본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 배경으로는 1983년의 중국 민항기 납치사건(대만측에서는 '6의사 사건' 이라 칭함) 및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시 청천백일기 게양 금지 사건 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 하자면 1983년 5월 한국 춘천 미군 비행장에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민항 소속 여객기가 공중 납치되어 불시착 한다. 납치범(대만 측에서는 반공 의사로 칭함) 6인은 대만(중화민국)측으로 송환을 요구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국은 당시 '중공'이던 중국과 사건 해결을 위해 본격적인 교섭을 하게 되고, 이 사건은 한국-중국 관계 정상화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다. 사건 발생 후 대만(중화민국) 정부는 공식 수교국이자 우방이던 한국 정부 측에 '반공의사'인 6인을 즉각적으로 대만으로 송환해 줄 것을 요구 하였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국제법 및 원칙에 따라 사건을 처리할 것을 선언 하고, 항공기 납치범(6의사)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실형을 선고 한다. 그리고 항공기 기체는 중국으로 반환하고 납치범 6인은 인도주의적 원칙을 적용하여 본인들의 의사에 따라 강제 추방 형식으로 대만으로 송환한다. 이 사건 처리에 있어서 대만 정부는 납치범(6의사)의 즉각적인 대만으로의 송환을 요구 하였지만,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 들이지 않고, 국제법 및 관례에 의거하여 처리 함으로서 수교국이던 대만 측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다.

 

이 사건 발생 후인 1986년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이 개최 된다. 1984년 부터 '차이니즈 타이페이'의 명칭으로 국제 스포츠 무대에 복귀한 대만도 참가를 했고, 중국 또한 대회에 참가를 하였다. 이런 상황 중에서 대만농구대표팀이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사용하지 못 하게 한 운영위원회 측의 조치에 항의하여 본국으로 철수 하였고, 이 사실은 대만 현지 언론에 크게 보도 되어 대만 내에서 반한 감정이 들끓었다. 한국 측의 이런 조치에 대만 국민들은 타이베이 한국대사관 앞에서 태극기를 불태우고, 돌을 던지는 등 격렬한 항의를 벌였다. 

 

이 두가지 사건 및 한국정부의 호칭 변경 문제(중공을 중국으로, 중화민국(자유중국)을 대만으로 호칭) 등이 1992년 단교 이전 한국과 대만 관계에 금이 가게 된 대표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988년 노태우 정부의 출범 이후 '북방정책'에 가속 페달을 밟던 한국 측의 움직임에 대만 정부 또한 한국과의 단교는 시간 문제이지 '기정사실'로 받아 들이고, 한국과의 단교 시점을 늦추고, 단교 할 경우 중국 측으로 넘어가야 할 명동 대사관을 제3자에게 매각하거나 명의 변경을 하기 위해서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992년 5월, 대만 정계의 실력자이던 장옌스(將彦士) 총통부 비서장(대통령 비서실장)을 총통 특사로 파견하여 한국 정부의 중국과의 수교 진척 상황을 문의함과 동시에, 명동 대사관 처리에 대한 한국 정부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도 옛 친구도 소중히 하는 것이 동양의 도리" 이며 "중국과의 수교 협상 진전 사항에 대해서는 대만 측에 적절히 토보할 것"이라는 말과 "명동 대사관 처리 문제는 한국 정부가 간여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입장 표명을 함으로서 대만 정부를 안심 시켰다. 하지만, 중국과의 수교 협상 과정 상에서 최후의 협상 카드 였던 명동 대사관 처리 문제에 대해서 한국 정부는 철저하리 만큼 중국 측의 입장을 받아 들였고, 중국과의 수교 협상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고, 이 문제로 인하여 대만에 대한 단교 일정 통보 또한 조정되었다.

때문에 단교를 1주일 도 체 남겨 두지 않은 1992년 8월 18일 1차 비공식 통보, 단교 3일 전인 8월 21일 2차 공식 통보 하여, 대만 측으로서는 명동 대사관을 처리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을 주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대만이 매각 또는 제3자에게로 명의 이전을 하려던 명동 대사관은 중국 측으로 반환 되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단교 과정 상에서 대만 측에서는 옛 친구를 배려하지 않는 한국 정부에 대해서 서운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단교 통보 및 대사관 처리 방식에 있어서 당시 한국 측이 참고할 수 있는 방법은 3가지가 있었다. 첫 째는 프랑스, 일본의 방식으로 단교(프랑스 1964년, 일본 1972년) 후 자국의 대사관의 반환을 거부하는 대만 측에 대하여 프랑스와 일본 정부는 경찰력을 투입하여 대사관 직원들을 강제 퇴거 시킨 후 대사관을 중국 측으로 넘겼다. 이 과정 상에서 양측이 물리적인 충돌을 벌이는 불상사가 발생 한 것 또한 사실이다. 

 

두번째로 미국 방식으로, 1978년 12월 미국 정부의 1979년 1월 1일자 단교 통보 이후, 대만 정부는 미국내 대사관, 영사관, 문화원 등 자국의 외교 자산을 친대만계 기업 및 단체로 10달러라는 상징적인 금액으로 매각하였고, 미국 정부 또한 이를 묵인하는 방식으로 대만은 미국내 외교 자산을 사실상 보존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중국 측의 보복 조치로 중국 정부는 중국내 미국 자산에 대한 재산동결 조치를 취하였고, 수교 이후 미국은 중국 내 대사관 부지 및 건물을 확보하는데 상당 기간 동안 애를 먹어야 했다.

 

세번째로 1990년 대만과 단교한 사우디아라비아 방식으로, 대만과 단교 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이슬람 율법을 근거로 단교 후에도 대만 대사관이 사용하던 외교 자산을 타이베이경제문화대표부가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고, 여기에 대해 중국 정부는 항의하였다.

 

한국의 경우 대사관 및 기타 외교자산을 중국 측으로 양도 하기로 약속 하였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프랑스, 일본의 예처럼 경찰력을 투입하여 강제 퇴거 시키는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만 정부는 대사관에서 물리적인 충돌 없이 퇴거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에 서운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 만은 사실이다. 특히, 청제국 시절에 구입한 명동 대사관은 별개로 하더라도 중화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구입한 부산 총영사관저 또한 중국 측으로 소유권을 이전하게 한 한국 정부의 조치에 대해서 심한 불만과 항의를 표시한 것 또한 사실이다.

 

대만과 단교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처음에 고위급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여 대만 정부의 양해를 구하는 방법도 고려 하였으나, 대사관 처리 문제 및 중국-북한 관계 등의 문제 때문에 사전에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미국, 일본 등 다른 국가들의 사례 처럼 추후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 할때, 비록 면죄부를 줄 수는 없을지라도 한국 정부의 조치가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대만에 대해 특별히 서운 했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면 왜? 대만은 유독 한국 정부의 처사에 대해서만 서우운한 감정을 가지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대만이 처한 상황을 좀더 살펴 보아야 한다. 1990년까지 당시 대만의 3대 수교국은 한국,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3개국이었다. 그중 1990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단교 한 후 한국의 비중은 더욱 커졌으며, 한국은 아시아 지역 유일의 수교국이었다. 특히, 한국(대한민국)정부와 대만(중화민국)정부의 오랜 역사적 인연을 종합 할 때 가장 중요한 수교국이자, 최후의 외교 거점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런 한국의 단교가 대만에 미친 파장은 컸고, 결과적으로 대만에 대한 배려가 소홀했던 당시 한국정부의 처사는 대만의 가슴에 큰 응어리로 남았다.

 

다음으로 대만 국내 정치 상황을 살펴 보면, 당시 국민당 정부는 1986년 창당된 민진당 등 야권의 도전 및 국내의 민주화 요구 등 내부적인 도전에 직면 해 있었다. 그리고 1993년 총선을 앞둔 상황. 이런 정치 상황 속에서 최대의 우방국이자 가장 중요한 수교국인 한국의 단교 통보는 정권에 큰 타격을 준 것이 사실. 때문에 이런 내부 불만 및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한 분출구로서 한국과의 단교 문제를 지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두 나라 사이의 오랜 역사적 인연을 들 수 있다. 일제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땅에서 항일 운동을 벌일 당시, 장제스 총통과 국민당 정부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국민당 정부는 최초로 정부를 승인하고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이후에도 당시 대만도 형편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지원 또한 해 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대만의 원로 세대들은 한국 정부의 처사를 '배은망덕한 일'로 평가 하였고, 당시 행정원장, 외교부장 등 정부 고위층 인사들은 한국 저우 및 한국 사절단을 향하여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 내었다. 때문에 대만 측이 한국 측의 단교 조치에 대하여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훨씬 더 서운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끝으로 대만 측이 한국에 대하여 유독 서운한 감정을 가지게 된 원인으로는 단교 후 관계 정리 문제에 있다. 1972년 단교한 일본의 경우 단교 후 설치한 비공식 대표기구인 '재단법인 교류협회'를 통하여 대만과 경제, 문화 방면의 교류를 강화 하는 한편, 대 대만 투자 및 기술 지원 등을 강화하여 '실질 관계'를 강화 시켜 대만 측의 감정을 풀어 나갔다. 1979년 단교한 미국의 경우 1979년 4월 미국 의회 에서 '국내법'형식으로 '대만 관계법'을 통과 시킨 후 비공식 관계의 틀 속에서 실질관계 유지를 도모하였다. 이에 비하여 단교 이후 중국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해 온 한국의 경우 상대적으로 이들 국가에 비해 대만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 특히, 이후 명동 축제시 청천백일기 문제, 화교학교 국기 게양 문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주한중국대사관 및 중국 정부의 입장 만을 수용하여 대만 정부를 자극 하였고, 이후 2008년왕진핑 입법원장(국회의장)의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참석 무산 건 등 두 나라의 외교 마찰은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까지 대만에 있어서 1992년 8월의 한국과 단교 문제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by Chang-geun Choi (최창근 崔彰根) [본문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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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5月 :

 

김병욱 감독에게 MBC <지붕 뚫고 하이킥>에 관해 묻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만큼 이 작품에는 물어서 확인하고 싶은 단서와 징후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을 듣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에게 <지붕 뚫고 하이킥>이란 명징하게 단어로 축약할 수 없는 복잡하고 섬세하며 생생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의 세월동안 그가 만들어낸 온갖 인물들과 패턴과 테크닉이 접목된 가운데 날카롭게 벼려낸 아르고스의 눈이 쉬지 않고 인생의 진실을 주시하는 그의 작품이란 그렇게나 무거운 것이고, 그래서 그 세상을 만들어낸 김병욱 감독의 어깨는 조금 지쳐 있었다. 그러나 우울함 속에서 코미디를 만들고, 고단함 속에서 126편의 드라마를 만들어 낸 그의 신체는 지칠지언정, 그의 생각만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수줍지만 강력하게, 느리지만 끝까지 밀어붙이는 ‘알고 보면 무서운 사람’ 김병욱 감독의 진심은 그래서 돌아서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울림을 가졌다. 마치 그 드라마의 엔딩처럼.

10.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지붕 뚫고 하이킥>의 결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최근에 이렇게 큰 파장을 남기는 드라마가 없었던 것 같다.
김병욱 감독: 욕을 많이 먹었다. 시트콤계의 유영철이라는 댓글까지 있더라. (웃음) 마지막 회는 그렇게 대본이 안 써질 수가 없었다. 녹화 들어가기 직전까지 마지막 두 신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가 리허설 후에 빈 시간 동안 숙직실에서 대본을 완성했는데, 그래서 대사를 좀 더 다듬지 못한 점이 아쉽다.

“희망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게 아니다”



10. 작가들이나 주변에서는 결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 상태였나.
김병욱 감독: 작가들이 결말에 반대 의견이 있어서 수정안을 준비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종영 일주일쯤 전에 신세경과 최다니엘을 불러다가 결말 얘기를 했더니 둘 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죽음으로 끝나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거기서 힘을 얻기도 했다.

10. 작품 초반부터 이런 결말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김병욱 감독: 갈지자를 그리다가 처음에 생각했던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인데, 결국 스스로를 납득시켰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결국 80%의 시청자가 납득하지 못한 것 같지만. (웃음) 그리고 사실, 촬영하는 날 아침에 비가 많이 왔다. 그래서 그렇게 밀고 나갔다.

10. 비 때문이라고?
김병욱 감독: 내가 생각했던 결말을 위해서는 그런 날씨가 필요했는데 마침 폭우가 오는 거다. 그래서 일단 배우들에게 장면을 촬영하도록 시켰고, 찍어온 것을 보니까 처음 의도대로 죽음을 암시해도 될 것 같은 톤으로 나왔더라. 엔딩은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찍고 싶었다. 빗소리나 와이퍼 소리 같은 현장음도 세게 들리고, 예쁘기보다는 가장 리얼하게 옆에 사람이 탄 것처럼 보이려고 했다. 그래서 잔잔한 음악도 깔지 않았다. 달달한 게 아니라 처절한 느낌으로.

10. 결과적으로는 많은 시청자들의 반발이 있었다.
김병욱 감독: 작품이 희망을 못 줬다고 비난하는데, 희망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게 아니다. 보는 사람이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쉬운 희망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대로 느끼고 살아라, 그런 의도였다. 보통 드라마를 보면 힘든 고시에 통과하는 것도 디졸브 몇 번하고 절에 들어가면 성공하지 않나.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이 의지를 갖는 건 너무 너무 힘든 일이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아프면 역설적으로 희망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0. 성장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더라.
김병욱 감독: 정음이와 세경이의 성장은 다른 방식이다. 정음이는 활달하고 개척하는 성격이라 외적인 성장이 가능하지만, 세경이는 내적인 성장을 해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아이가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을 때 취할 수 있는 태도로 성장을 가늠할 수 있는 거다. 세경이가 운이 좋아서 60년을 더 살았든, 5분 뒤에 죽었든 그 성장의 결과는 큰 차이가 없을 거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있다가, 없다가를 반복하다가 물리적인 삶이 끝나면 그 반복이 끝나는 것뿐이다. 염세적인 이야기지만 시간의 길이는 무의미한 거다.

10. 그 성장을 보여주는 세경의 마지막 대사에 사실은 김병욱이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 있었지 않나.
김병욱 감독: 조급하게 했지. 미리 다 했어야 하는 말인데. 그 부분에서 스무 살짜리가 오십 대 아저씨처럼 말한 것에는 스스로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더 이상 고칠 수가 없었다.

“쿨한 것만 좋아하는 가치판단에 반항하고 싶기도 했다”



10. 중산층 이상의 가정을 풍자하는 태도는 여전하지만 세경을 통해서 어떤 삶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지붕 뚫고 하이킥>으로 오면서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기에 이런 시각 차이를 보여주는 건가.
김병욱 감독: 그 사이에 변화도 있지만 작품을 하면서 느낀 것도 많다. 가난한 신애의 식탐에 대해 사람들이 화를 내는 반응이랄지 사회가 드라마에 대해서 갖는 시각에 대해 할 말이 생겼다. 신애나 세경에게 세상은 말도 안 되게 가혹하더라. 같은 짝사랑인데 준혁이의 마음은 이해하면서, 세경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실제 피해를 준 것도 없는데, 굉장히 꿀꿀하고 불쾌하다고 생각한다. 준혁이가 노래를 불러주는데 세경이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고, 준혁이가 와플을 먹자고 했는데 가버렸다고 화를 내는데 그건 일종의 이지메가 아닌가.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만 사랑을 생각하는 사회에 화가 났었다. 그래서 멋있고, 쿨한 것만 좋아하는 가치판단에 반항하고 싶기도 했다. 구질구질하고 빈티가 나는 순간을 싫어하는 냉정함이 세경이가 행복한 꼴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세경의 엔딩에는 이렇게 불행한 아이니까, 더 이상 욕하지 말라는 마음도 조금은 섞여 있었다.

10.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표시한 것은 개연성에 관한 부분이었다.
김병욱 감독: 죽는다는 것에 개연성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삶이라는 것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렇게 덧없으니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다. 사람들은 이렇게 허무한 이야기를 왜 봐야 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드라마 하나쯤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10. 사실은 <거침없이 하이킥> 때부터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아닌가. 제목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도 유사한 면이 많아서 같은 재료를 다른 방향에서 저며 나갔다는 인상이 든다.
김병욱 감독: 원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문제는 40회까지는 그럭저럭 준비해온 대로 되어 왔는데, 이후로는 스케줄이 지옥이다 보니 의도한 대로 잘 해내지 못한 부분은 있다.

10. 스케줄이 빡빡할수록 새로운 생각을 하기보다는 맨 처음 의도에 천착하게 될 텐데.
김병욱 감독: 마지막은 있는데 도달하기가 어려웠다. 지훈과 정음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하면 안 되는 줄 아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있었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한데 그 둘의 이야기는 비교적 빨리 구성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 내심 지훈과 세경이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훈, 정음의 팬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점점 힘에 부친 거다. 학림다실에 가는 92회처럼 한 회로 만회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름 미니 엔딩으로 생각한 121회에서 사람들도 무리한 시도라는 걸 눈치챘고, 결국 실패한 부분이 있다.

10. 준혁과 세경의 이야기도 후반부에는 많이 전개되었지 않나.
김병욱 감독: 어느 순간 연기자에게 굉장히 이입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점이 작용하기도 했다. 대본을 쓸 때도 지훈과 세경 못지않게 준혁과 세경에 많이 빠져 있기도 했고.

“<지붕 뚫고 하이킥>은 시트콤이 아니다”



10. 늘 수동적인 세경이가 유일하게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준혁이기 때문에 세경에게 자유로운 시간을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김병욱 감독: 그런 점도 있다. 배우가 실명을 쓰기 때문에 인터넷에 걔가 우는 게 꾸질 꾸질 하다고 하는 것을 보고 미안해지는 시점이 있었다. 그래서 자유롭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을 진실로 좋아하면, 나에게 잘해줬던 사람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알게 된다. 세경도 어느 순간 그런 준혁의 마음을 진정으로 느꼈던 거다.

10. 그런 점에서 후반에 세경이 준혁에게서 본 것은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김병욱 감독: 짝사랑을 통한 성장이 그런 거다. 준혁이를 이해해 주는 것. 내가 표현을 잘못 했을 수는 있지만 전날 키스했다고 세경이를 미친 여자 취급을 하기도 하던데, 억울한 면이 있다. 그 순간에 그럼 “됐고!” 하면서 거절 했어야 하나? 그러면 또 얼마나 이기적인 아이로 보였겠나. 정말로 세경이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아이다.

10. 마지막 회에 지훈이 정음에게 줄 반지를 샀기 때문에 세경이 정음에게 피해를 준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지훈이 정음에게도 애정이 있지만, 세경과는 서로의 가장 깊은 고독을 이해한 사람으로서의 특별한 마음이 있지 않나. 두 감정이 다른 종류라고 생각된다.
김병욱 감독: 그렇다. 그리고 고독을 보는 순간 사랑이 시작되는 거다. 사람들은 지훈의 정음을 향한 마음을 사랑이라고 통칭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세경에 대한 지훈의 마음은 발전되어 왔다. 나는 끊임없이 중간 과정을 그렸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그런 자연스러운 감정을 못 견뎌 한다. 지훈은 솔직하지 못해서 고독한 인물이다. 마지막에 세경을 붙잡았을 때도 스스로 느꼈지만 사회적인 역할에 충실하려고 감정을 가늠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세경이 부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이 느껴 온 감정의 정체를 알게 되는 거다. 타인의 깊은 고독을 완벽하게 느끼면서 사랑을 자각하는 거고, 그것은 자신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세련되게 표현을 못 한 점은 있으나 즉흥적으로 갈팡질팡 한 건 아니다.

10. 시트콤이라는 장르 때문에 복합적인 감정선에 거부감을 느끼는 시청자들도 많았던 것 같은데, 외부에서 한계를 결정지어 버리는 상황 때문에 많이 억울할 것 같다.
김병욱 감독: 그래서 내가 시트콤이 아니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었는데 말이다. (웃음) 그리고 시트콤이니까 달달하게만 생각하려는 그 고정관념에 반발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10. 다른 장르를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 방송에서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편견이 너무 강력하게 작용한다.
김병욱 감독: 잘못된 장르에서 일을 한다는 혐의가 있고, 불편하기는 하다. 다른 장르에 가면 2등밖에 못하니까 여기서 있어 보이려고 한다는 지적도 있고. 하지만 25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좋다.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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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MACAU

2010. 3. 25. 03:19 from 소소한 그녀의 Tip


http://macau.o.cn/?locale=zh_cn 

중국 남부 해안지역에 있는 특별행정구.

마카오의 번화가 세나도 광장과 주요 명소, 마카오, 중국
김대건 신부 동상이 있는 까모에스 공원, 마카오, 중국
중국 광둥 성[廣東省]의 항구도시인 광저우[廣州]에서 시작되는 주장 강[珠江] 어귀 서쪽에 있으며 영국 직할 식민지였다가 1997년 중국에 반환된 홍콩의 맞은편에 있다. 광둥 성으로부터 돌출한 작고 좁은 반도로 형성되어 있으며 타이파·콜로아네 섬을 포함한 총면적은 17㎢이다. 이 가운데 마카오 시가 반도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마카오의 중국식 표기인 아오먼[澳門]은 선원들의 수호신인 '아마여신(阿媽女神)의 만(灣)'에서 유래했다. 반도와 섬은 그다지 넓지 않은 평지로 둘러싸인 작은 화강암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고 높은 지역이 많지 않다. 최고봉은 콜로아네 섬에 있는데 높이가 174m밖에 되지 않는다. 영구적인 하천이 없어서 빗물을 모아두었다 쓰거나 본토에서 물을 수입해 쓴다. 마카오는 열대지방에 속해 있으며 연간 총강수량은 1,020~2,540㎜이다. 이 가운데 4~9월의 남서계절풍이 불어오는 여름철 우기에 비가 내린다.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한 여름은 덥고 습기가 많으며 불쾌한 날씨가 이어지는 반면 겨울에는 쾌적하다.

땔나무와 건축용 목재를 벌채하기 이전 마카오의 구릉지대에는 천연 그대로의 초목이 사철 푸른 숲을 이루고 있었다. 두 섬에는 농지가 조금 남아 있으나 거주민들의 수효는 적다. 주요농산물은 채소이며 특히 배추·양파·상추·콩이 생산된다. 1513년 포르투갈 범선이 처음 주장 강 어귀에 닻을 내린 이래 포르투갈인들이 정기적으로 마카오에 왔다. 1553년 중국과의 교역이 정식으로 이루어진 후,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중국·일본과 무역하는 데 있어 중요한 화물집산지가 되었다. 비록 18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중국과 외부 세계와의 교역이 점차 광저우로 집중되었지만, 상인들은 교역기인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만 광저우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국제무역 상인집단이 마카오 지역에 생겨났다. 19세기 중반부터는 홍콩의 교역량이 마카오를 앞서기 시작했다. 몇 년 사이에 상인들은 더 이상 마카오를 찾지 않게 되었다. 이후로 마카오는 더 이상 비중있는 화물집산지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마카오에 거주하고 있는 포르투갈인들은 언제나 소수였고 중국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해왔다.

주장 강 어귀의 어업을 제외하면, 마카오에는 천연자원이 거의 없다. 자유항인 마카오의 중요한 재원은 무역이다. 중국은 마카오에 식량과 싼값의 소비재를 공급한다. 마카오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은 직물이지만 그밖에도 폭죽·장난감·중국술·향(香)심지·녹나무상자·조화(造花)·전기제품 등을 수출하고 있다. 또한 이전부터 금괴 밀수로 이름이 높다. 그러나 마카오의 경제를 지탱하는 실질적인 수입원은 관광산업인데, 사실상 가까이 있는 홍콩인들의 행락지 역할을 하고 있다. 수중익선(水中翼船)이 관광객들을 홍콩에서 마카오의 무수한 카지노 도박장, 바, 마사지 업소 등의 장소로 실어나른다. 속도가 느린 전통 나룻배도 여전히 마카오와 홍콩 사이를 정기적으로 왕복한다. 마카오 내의 교통시설은 양호한 편이며 반도와 두 섬 사이를 왕래하는 연락선도 있다.

1987년 포르투갈과 중국은 1999년 12월에 마카오를 중국 통치하에 복귀시킨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양국은 중국 통치가 시작된 후 50년 동안 고유의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 거주민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권리, 지역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해 마카오의 자치를 보장하는 규정에 동의했다. 이 협정에 따라 1999년 12월 마카오는 중국으로 반환되었으며 홍콩과 마찬가지로 1국 2체제의 적용을 받는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5년간의 초등교육은 의무교육이다. 표면적으로는 포르투갈식 건축물과 풍습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국식 문화가 우세하다. 면적 26.8㎢, 인구 443,00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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