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대만은 한국의 단교에 대해서 유독 서운해 할까?


지난 금요일 필자(최창근)은 현재 공부하고 있는 국립정치대학 한국어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한국인 교수 한분으로 부터 한가지 요청을 받았다. 요지는 "대만이 1992년 한국의 단교 사태에 대해서 유독 서운해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며, 미국, 일본등 다른 나라들의 단교 당시의 상황은 어떠 했는가? 에 대해서 설명을 해 달라"는 것 이었다. 비록 필자는 정치외교학 전공자도 중국학 전공자도 아니지만, 꽤 오래전 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온 사실을 아시기에, 아마추어인 필자에게 그분께서 그러 요청을 해 오신 것이었다.

 

그런 후 다음날인 토요일 필자와 그 분이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그 교수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설명을 요청하신 직접적인 배경에는 대만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그 분의 따님이 수업시간에 친구들로 부터 한국-대만의 단교 사태에 대해서, "대만은 한국의 신의와 은혜를 배신하였고, 당시 대만(중화민국)의 주한국 대사관이 있던 명동 일대에 있는 기업들은 상당수 대만 소유 였으며, 대만이 한국을 도와 그런 기업들도 세우고 큰 빌딩들도 세워 준 은혜(?)를 베풀었는데, 한국은 은혜를 저버리고 대만과 단교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아버지에게 사실이 그런지? 왜 대만이 한국에 대해서 그렇게 서운하게 생각하는지? 에 대해서 문의를 해 온 사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교수의 따님은 자신의 친구들이 부모로 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이런 의문을 제기 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수년째 대만에 거주하시는 그 교수께서 평소 대만의 지인들로 부터 한국에 대해 유독 서운한 감정을 많이 느낀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본인도 좀더 알고 있어야 겠다는 생각에, 이 문제에 관심이 많은 아마추어인 필자에게 이 점에 대해서 문의해 오신 것이었다.

 

1992년 단교 사태 이후, 대만정부 및 국민들이 한국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품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의문은 왜? 한국에 대해서만 유독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 응어리진 감정이 완전해 해소 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에 있다. 그래서 이문제에 대해서 그동안 정리한 사실들과 이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에 대해서 이번 글에서는 다루도록 한다.

 

1992년 8월 단교 당시 대만 측이 한국 측에 악감정을 가지게 된 원인으로는 당시 '한국 정부의 세련되지 못 한 일처리'를 들 수 있다. 분단국가인 한국 입장에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주요 무역대상국으로 부상하던 중국과 수교를 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운 중국측의 입장을 수용하여 대만과 단교 하면서 불필요하게 대만 측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 또한 사실.

 

1992년 단교 이전 한국-대만 관계가 본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 배경으로는 1983년의 중국 민항기 납치사건(대만측에서는 '6의사 사건' 이라 칭함) 및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시 청천백일기 게양 금지 사건 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 하자면 1983년 5월 한국 춘천 미군 비행장에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민항 소속 여객기가 공중 납치되어 불시착 한다. 납치범(대만 측에서는 반공 의사로 칭함) 6인은 대만(중화민국)측으로 송환을 요구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국은 당시 '중공'이던 중국과 사건 해결을 위해 본격적인 교섭을 하게 되고, 이 사건은 한국-중국 관계 정상화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다. 사건 발생 후 대만(중화민국) 정부는 공식 수교국이자 우방이던 한국 정부 측에 '반공의사'인 6인을 즉각적으로 대만으로 송환해 줄 것을 요구 하였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국제법 및 원칙에 따라 사건을 처리할 것을 선언 하고, 항공기 납치범(6의사)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실형을 선고 한다. 그리고 항공기 기체는 중국으로 반환하고 납치범 6인은 인도주의적 원칙을 적용하여 본인들의 의사에 따라 강제 추방 형식으로 대만으로 송환한다. 이 사건 처리에 있어서 대만 정부는 납치범(6의사)의 즉각적인 대만으로의 송환을 요구 하였지만,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 들이지 않고, 국제법 및 관례에 의거하여 처리 함으로서 수교국이던 대만 측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다.

 

이 사건 발생 후인 1986년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이 개최 된다. 1984년 부터 '차이니즈 타이페이'의 명칭으로 국제 스포츠 무대에 복귀한 대만도 참가를 했고, 중국 또한 대회에 참가를 하였다. 이런 상황 중에서 대만농구대표팀이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사용하지 못 하게 한 운영위원회 측의 조치에 항의하여 본국으로 철수 하였고, 이 사실은 대만 현지 언론에 크게 보도 되어 대만 내에서 반한 감정이 들끓었다. 한국 측의 이런 조치에 대만 국민들은 타이베이 한국대사관 앞에서 태극기를 불태우고, 돌을 던지는 등 격렬한 항의를 벌였다. 

 

이 두가지 사건 및 한국정부의 호칭 변경 문제(중공을 중국으로, 중화민국(자유중국)을 대만으로 호칭) 등이 1992년 단교 이전 한국과 대만 관계에 금이 가게 된 대표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988년 노태우 정부의 출범 이후 '북방정책'에 가속 페달을 밟던 한국 측의 움직임에 대만 정부 또한 한국과의 단교는 시간 문제이지 '기정사실'로 받아 들이고, 한국과의 단교 시점을 늦추고, 단교 할 경우 중국 측으로 넘어가야 할 명동 대사관을 제3자에게 매각하거나 명의 변경을 하기 위해서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992년 5월, 대만 정계의 실력자이던 장옌스(將彦士) 총통부 비서장(대통령 비서실장)을 총통 특사로 파견하여 한국 정부의 중국과의 수교 진척 상황을 문의함과 동시에, 명동 대사관 처리에 대한 한국 정부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도 옛 친구도 소중히 하는 것이 동양의 도리" 이며 "중국과의 수교 협상 진전 사항에 대해서는 대만 측에 적절히 토보할 것"이라는 말과 "명동 대사관 처리 문제는 한국 정부가 간여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입장 표명을 함으로서 대만 정부를 안심 시켰다. 하지만, 중국과의 수교 협상 과정 상에서 최후의 협상 카드 였던 명동 대사관 처리 문제에 대해서 한국 정부는 철저하리 만큼 중국 측의 입장을 받아 들였고, 중국과의 수교 협상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고, 이 문제로 인하여 대만에 대한 단교 일정 통보 또한 조정되었다.

때문에 단교를 1주일 도 체 남겨 두지 않은 1992년 8월 18일 1차 비공식 통보, 단교 3일 전인 8월 21일 2차 공식 통보 하여, 대만 측으로서는 명동 대사관을 처리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을 주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대만이 매각 또는 제3자에게로 명의 이전을 하려던 명동 대사관은 중국 측으로 반환 되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단교 과정 상에서 대만 측에서는 옛 친구를 배려하지 않는 한국 정부에 대해서 서운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단교 통보 및 대사관 처리 방식에 있어서 당시 한국 측이 참고할 수 있는 방법은 3가지가 있었다. 첫 째는 프랑스, 일본의 방식으로 단교(프랑스 1964년, 일본 1972년) 후 자국의 대사관의 반환을 거부하는 대만 측에 대하여 프랑스와 일본 정부는 경찰력을 투입하여 대사관 직원들을 강제 퇴거 시킨 후 대사관을 중국 측으로 넘겼다. 이 과정 상에서 양측이 물리적인 충돌을 벌이는 불상사가 발생 한 것 또한 사실이다. 

 

두번째로 미국 방식으로, 1978년 12월 미국 정부의 1979년 1월 1일자 단교 통보 이후, 대만 정부는 미국내 대사관, 영사관, 문화원 등 자국의 외교 자산을 친대만계 기업 및 단체로 10달러라는 상징적인 금액으로 매각하였고, 미국 정부 또한 이를 묵인하는 방식으로 대만은 미국내 외교 자산을 사실상 보존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중국 측의 보복 조치로 중국 정부는 중국내 미국 자산에 대한 재산동결 조치를 취하였고, 수교 이후 미국은 중국 내 대사관 부지 및 건물을 확보하는데 상당 기간 동안 애를 먹어야 했다.

 

세번째로 1990년 대만과 단교한 사우디아라비아 방식으로, 대만과 단교 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이슬람 율법을 근거로 단교 후에도 대만 대사관이 사용하던 외교 자산을 타이베이경제문화대표부가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고, 여기에 대해 중국 정부는 항의하였다.

 

한국의 경우 대사관 및 기타 외교자산을 중국 측으로 양도 하기로 약속 하였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프랑스, 일본의 예처럼 경찰력을 투입하여 강제 퇴거 시키는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만 정부는 대사관에서 물리적인 충돌 없이 퇴거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에 서운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 만은 사실이다. 특히, 청제국 시절에 구입한 명동 대사관은 별개로 하더라도 중화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구입한 부산 총영사관저 또한 중국 측으로 소유권을 이전하게 한 한국 정부의 조치에 대해서 심한 불만과 항의를 표시한 것 또한 사실이다.

 

대만과 단교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처음에 고위급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여 대만 정부의 양해를 구하는 방법도 고려 하였으나, 대사관 처리 문제 및 중국-북한 관계 등의 문제 때문에 사전에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미국, 일본 등 다른 국가들의 사례 처럼 추후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 할때, 비록 면죄부를 줄 수는 없을지라도 한국 정부의 조치가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대만에 대해 특별히 서운 했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면 왜? 대만은 유독 한국 정부의 처사에 대해서만 서우운한 감정을 가지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대만이 처한 상황을 좀더 살펴 보아야 한다. 1990년까지 당시 대만의 3대 수교국은 한국,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3개국이었다. 그중 1990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단교 한 후 한국의 비중은 더욱 커졌으며, 한국은 아시아 지역 유일의 수교국이었다. 특히, 한국(대한민국)정부와 대만(중화민국)정부의 오랜 역사적 인연을 종합 할 때 가장 중요한 수교국이자, 최후의 외교 거점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런 한국의 단교가 대만에 미친 파장은 컸고, 결과적으로 대만에 대한 배려가 소홀했던 당시 한국정부의 처사는 대만의 가슴에 큰 응어리로 남았다.

 

다음으로 대만 국내 정치 상황을 살펴 보면, 당시 국민당 정부는 1986년 창당된 민진당 등 야권의 도전 및 국내의 민주화 요구 등 내부적인 도전에 직면 해 있었다. 그리고 1993년 총선을 앞둔 상황. 이런 정치 상황 속에서 최대의 우방국이자 가장 중요한 수교국인 한국의 단교 통보는 정권에 큰 타격을 준 것이 사실. 때문에 이런 내부 불만 및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한 분출구로서 한국과의 단교 문제를 지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두 나라 사이의 오랜 역사적 인연을 들 수 있다. 일제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땅에서 항일 운동을 벌일 당시, 장제스 총통과 국민당 정부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국민당 정부는 최초로 정부를 승인하고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이후에도 당시 대만도 형편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지원 또한 해 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대만의 원로 세대들은 한국 정부의 처사를 '배은망덕한 일'로 평가 하였고, 당시 행정원장, 외교부장 등 정부 고위층 인사들은 한국 저우 및 한국 사절단을 향하여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 내었다. 때문에 대만 측이 한국 측의 단교 조치에 대하여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훨씬 더 서운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끝으로 대만 측이 한국에 대하여 유독 서운한 감정을 가지게 된 원인으로는 단교 후 관계 정리 문제에 있다. 1972년 단교한 일본의 경우 단교 후 설치한 비공식 대표기구인 '재단법인 교류협회'를 통하여 대만과 경제, 문화 방면의 교류를 강화 하는 한편, 대 대만 투자 및 기술 지원 등을 강화하여 '실질 관계'를 강화 시켜 대만 측의 감정을 풀어 나갔다. 1979년 단교한 미국의 경우 1979년 4월 미국 의회 에서 '국내법'형식으로 '대만 관계법'을 통과 시킨 후 비공식 관계의 틀 속에서 실질관계 유지를 도모하였다. 이에 비하여 단교 이후 중국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해 온 한국의 경우 상대적으로 이들 국가에 비해 대만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 특히, 이후 명동 축제시 청천백일기 문제, 화교학교 국기 게양 문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주한중국대사관 및 중국 정부의 입장 만을 수용하여 대만 정부를 자극 하였고, 이후 2008년왕진핑 입법원장(국회의장)의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참석 무산 건 등 두 나라의 외교 마찰은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까지 대만에 있어서 1992년 8월의 한국과 단교 문제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by Chang-geun Choi (최창근 崔彰根) [본문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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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h Ave.를 마주하고있는 Metropolitan Museum 은 뉴욕시에서 소장품이 가장 많은 미술관으로
 전체를 둘러보기엔 무리수가 있을듯 싶어 19세기 유럽미술 중심으로 관람하기로 했다. 
그중에서도 빈센트 반 고흐를 보게 될 설레임은 홀로 흠모하던 남자사람을 만나는 마음이였다.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이 부럽지않은 웅장한 외관과 즐비하게 앉아있는 관광객들,
또한 이들을 위한 아낌없는 계단을 마주보고 섹소폰솔로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관람이 끝난 후엔 반드시 저곳에 앉아 뉴욕의 태양을 마음껏 마주해보길 권장한다.





창틀을 액자삼아 펼쳐지는 1층의 전경 , 천정에서 쏟아지는 자연채광은 한쪽 벽면을 화폭인듯 자연스레 밀착되어 있다.  






금빛장식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액자는 무색하다, 강렬한 그의 색감은 편견에 대항하듯 혹은 어느 쓸쓸한 마음을 위로하듯 메트로폴리탄의 안방마님처럼 그자리에 굳건하다.    










어느 유화에서나 느낄수있는 입체감이지만  붓의 터치 하나하나가 유난히도 신중하다. 
  










































안녕 , 고흐 !
모델 살 돈이 없어 유달리 많았던 40여점의 자화상 ,
영혼까지 예술가였던 고흐를 만나 던 순간 , 신을 대면 하는 찰라가 이러할까 .
거울을 마주한듯한 그의 눈빛은 떨림이 없다 .  
 






19세기 유럽회화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고흐관 ,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마주친 여자사람. 허리를 꽂꽂히 펴고 앉아 있는 기품에 반해서 사진한장 찍기를 부탁했더니 흔쾌히 승락해 주셨다.  언젠가 다시 고흐를 만나는 찰라를 마주하게 된다면 적어도 저만큼의 우아한 예의를 갖추고 오리라 .





 
1889, 1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 바로 나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리든지
아니면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내버려다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나중에는 하나의 연작으로 보여야 할 그림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너 하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삶은 이런 식으로 지나가버리고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일할 수 있는 기회도 한 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맹렬히 작업하고 있다.
나의 경우 더 심한 발작이 일어난다면
그림 그리는 능력이 파괴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발작의 고통이 나를 덮칠 때 겁이 난다.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작은 성공을 누리고 있지만,
과거에 정신병원 철창을 통해
밭에서 수확하는 사람을 내다보면서
느꼈던 고독과 고통을 그리워하는 나 자신.
그건 불길한 예감이다.

성공하려면, 그리고 계속되는 행운을 즐기려면,
나와는 다른 기질을 타고 나야 할 것 같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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